일못러에서 벗어나는 방법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권 대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쇼킹한 뉴스가 있어! 협력사지원팀에 유승식 대리 알지? 유 대리가 글쎄 말이야!"
한참 보고서 쓰느라 거북목이 되어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유승식 대리가? 무슨 일인데?"
"신입사원으로 온 남현지 씨랑 섬싱이 있는 게 분명해! 글쎄 강남의 카페에 단 둘이 앉아서 말이야"
"선팅이 있다고? 남현지 씨랑 같이 차에 선팅 했나?"
그 순간, 권 대리는 흥이 깨진 표정으로 정색을 하면서 사라졌다.
"선팅? 그 단어가 지금 왜 나와? 왜 이렇게 내 말을 못 알아들어!"
두 시 탈출 컬투쇼에나 나올 법한 황당한 스토리이지만, 실제 내가 했던 말이다. 유난히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고생하는 나는 이런 일을 종종 겪는다. 나뿐 아니라 단어를 잘못 알아듣고 오해해서 벌어지는 일들은 여기저기서 많이 벌어지고는 한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뉴스를 보다가 나를 불렀다.
"이제 금을 사야 돼? 금값이 두 배 오르는 동안 다이아몬드 값은 반으로 떨어졌대"
"이제 다이아몬드의 시대는 끝나는 건가?"
"그렇지. 요즘 랩 그로운(Lab-grown) 다이아몬드라고 실험실에 만든 다이아몬드 있잖아. 그거 때문이래"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매끄러운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매끄럽잖아"
아내는 입을 떡 벌린 표정으로 말을 더 잇지 못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직원이 큰 화제가 되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할머니와 통화하면서 인내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친절하게 잘 응대하였다. 이 내용은 언론에도 보도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나와 같은 회사 직원인 이 분은 당시 회사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느 할머니가 LG유플러스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LG유플러스 고객센터입니다"
"뭐라고? 어디?"
"LG유플러스입니다"
"LG에 불났다고?"
"아니요. LG에 불이 난 게 아니라 LG유플러스입니다"
"LG가 어디예요? 목욕탕?
"목욕탕이 아니라 LG유플러스입니다"
"목욕탕에 불이 났다고?"
이런 식으로 4분 가까이 대화는 쭉 이어진다. 이 대화를 보면서 고객센터 업무는 참 고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LG유플러스를 LG에 불났쓰로 알아들은 것이다.
한 할머니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깊은 맨홀 속으로 빠져버렸다. 무섭기도 하고 당황한 할머니는 소리 질렀다.
"사람 살려!"
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이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요?"
"사람 살려! 나 좀 살려줘요"
"뭐라고요?"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뭐라고요?"
이런 대화가 몇 번 반복되자 짜증이 난 할머니가 소리쳤다.
"그냥 가. 이 시발눔아!"
랩 그로운 다이아몬드, LG유플러스 고객센터, 맨홀에 빠진 할머니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유난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청력이 좋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청력 문제 때문이 아니라면, 이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듣는 사람이 이미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 상대방이 하는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미 결론을 낸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이 경우 내 생각과 충돌하는 메시지는 무의식적으로 튕겨내거나 걸러 듣게 되어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싫어하는 팀장, 동료가 말을 걸게 되면 또 뭣 때문에 시비를 거는 걸까 거부감부터 가지게 된다. 당연히 대화에 집중하기 고다는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 감정이 섞인 말을 할 때, 기분 나쁜 감정이나 분위기에 압도되어 메시지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아는 만큼 들리는 법이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주제, 전문 용어, 또는 맥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지식이 부족하면, 의미를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게 무슨 뜻인지 머리에서 생각하다가 뒤에 하는 말을 놓치게 되고 결국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의사들이나 법조인들이 모인 학회에 비전문가가 참석한다면 그 자리에서 나온 말들은 마치 외계인들의 언어처럼 들릴 것이다. 이처럼 배경지식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상대방의 표정, 몸짓, 말투 같은 비언어적 신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지랖이 쓸데없이 넓다. 팀원 소셜미디어에 들어가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며 댓글을 다는가 하면, 애인이랑 헤어졌다고 하면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꼬치꼬치 물어본다
이들은 상대방 말의 진짜 의도나 숨겨진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집주인이 "더 놀다 가세요!" 이러면 그게 진심인 줄 알고 한 시간이던 두 시간이던 더 놀다가는 눈치 없는 사람이다. 세 번째 사례에서 맨홀에 빠진 할머니가 외칠만한 소리가 "살려주세요!"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아도 맥락으로 볼 때 살려달라는 게 분명한데도 "뭐라고요?" 이러는 것은 분위기 파악을 잘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귀로 듣기만 할 뿐, 마음을 다해 집중하여 듣지 않는 경우이다. 내가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거나, 딴생각을 하느라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 경우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나게 된다. 회의나 대화 중에 스마트폰을 자꾸 들여다보는 경우 경청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ADHD나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경우, 이런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은 유난히 집중력이 약하기에 한 가지 일, 특히 내가 별로 관심이 없는 일에는 쉽게 집중력을 잃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런데 말귀가 어두워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항상 오해가 생기고 상대방은 대화를 기피하게 된다. 한 번 말해도 좀처럼 알아듣지를 못하니 상대방은 두 번, 세 번 이야기해야 하고 이는 짜증을 유발한다.
짜증만 유발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잘못 알아듣고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 이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주문을 100개 해야 하는데 1,000개로 알아듣고 발주한다면 이건 대형사고이다.
진주만 공습 직전, 일본은 외교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미국은 이를 직설적으로 이해하여 그냥 큰소리 한 번 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일본 특유의 돌려서 완곡하게 말하는 화법에 미국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오해한 것이었다.
이처럼 말귀가 어두워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더불어 같이 일해야 하는 회사 특성상 사고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문제로 큰 어려움이 있었다. 청력이 나쁜 게 결코 아닌데도 중요한 단어가 원래의 뜻과 다르게 들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중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도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그런 것일까? 이 문제는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해결책을 심층적으로 깊이 알아보고자 한다.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박하거나 다음에 내가 할 말을 생각하느라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순서대로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생각해 보자.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내용이 귀에 들리던가? 절대 아닐 것이다. 듣는 척은 해도 사실은 내 차례가 되면 무슨 말을 할지 머리를 쥐어짜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말할 때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지금은 듣는 시간'이라고 스스로 다짐하자.
상대방의 의도나 메시지를 미리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자.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먼저 비판부터 하려고 하면 상대방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게 된다. 꼬투리만 잡으려고 하기에 말을 왜곡해서 알아듣게 되기 때문이다.
대화 중에는 스마트폰에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하자. 대화의 최대의 적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스마트폰이다. 수시로 울리는 온갖 알람에 전화.. 여기에 정신이 팔리게 되면 더 이상 상대방의 목소리는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대화 중 팀장의 업무 지시 메시지가 날라든다. 그 메시지를 흘깃 보는 순간 흥이 다 깨지고 만다. 당장 이 일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되고, 상대방과의 즐거웠던 대화는 졸지에 귀찮게만 느껴지게 된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상대방과 대화할 때는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하고 대화에 임하자.
'말귀'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해한 바를 내 언어로 정리하여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가 끝난 후, "연 매출액 100억 원 이상인 대리점들이 이번 워크숍 참석 대상이라는 말씀이시죠? 맞나요?"와 같이 상대방이 한 말을 본인의 언어로 요약하여 되물어보자.
이렇게 하면 내가 잘못 이해를 즉시 바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당신이 집중해서 들었음을 확신시켜 줄 수 있어 신뢰를 높일 수 있다.
모호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구체적으로 질문하여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혹시 임원 후보자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또는 "연 매출 100억 원 대리점 리스트는 언제까지 처리해야 하는 건가요?"와 같이 질문하면 핵심을 놓치지 않게 된다.
말귀 잘 알아듣는 것은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형성된 내 대화 습관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대화 센스 이런 부분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드린 방법으로 대화를 한다고 해도 아마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꾸준히 훈련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집에서 가족들에게 대화할 때,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핵심 메시지를 한 번 찾아내보자.
"이번 연말에 아이들 데리고 우리 가족여행 가볼까?"
"어디 가고 싶어? 나는 성탄절 다음날부터 말일까지 휴가야"
"연말이라 비행기 표가 워낙 비싸니, 국내 여행으로 갈까?"
"부산은 남쪽이라 좀 따뜻할 테니 부산 여행 갈래?"
"부산 좋지! 우리 애들 데리고는 부산 한 번도 안 가봤잖아. 근데 첫째가 1월 2일부터 방학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지?"
"12월 26일이 금요일이니 첫째가 집에 오면, 그때 출발해서 2박 3일로 다녀오는 걸로 할까? 그러면 학교 안 빠져도 되니까.
이번 대화에서 핵심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가 학교에 빠지지 않도록 12월 26일(금)부터 2박 3일 부산 가족 여행을 계획하자' 일 것이다.
"교재 만드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 교재 표지 디자인 제가 리더십 교육 때 쓰려고 만들어서 팀 폴더에 저장한 건데 이 교재 표지로 쓰셨네요"
"아.. 그런가요? 팀 폴더에 있길래 써도 되는 줄 알고 썼어요"
"이거 리더십 교육 폴더에 제가 저장한 건데.. 미리 저한테 양해를 구했어야지요. 이러면 제가 리더십 교재 표지 다시 만들어야 하잖아요"
"제가 미리 양해를 구하고 사용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이번 대화에서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 '팀 폴더에 저장된 파일이라도 사용 전에는 반드시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는데,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리마인드 해보자. 대화가 끝나고 나면 혼자서 핵심 키워드나 숫자를 짧게 정리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을 반복해서 해나가면 나중에는 억지로 하지 않아도 핵심을 쉽게 캐치할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면, "죄송하지만, 제가 정리하면서 들을 수 있도록 조금만 천천히 말씀해 주시겠어요?"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대방 페이스대로 듣다 놓치는 것보다 천천히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여러 가지 주제를 동시에 이야기할 경우, "잠시만요, 이번 주 실적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지난주 실적에 대한 이야기부터 마무리해도 될까요?"라고 요청하며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참 중요하다. 직장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눈치가 빠르고 타이밍의 귀재이며 그것과 더불어 상대방의 말을 듣고 핵심을 기가 막히게 잘 포착해 낸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것은 큰 강점인 것이다.
그러나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절망하지 말자. 잘 알아듣는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은 솔직히 쉽지 않지만, 남들만큼 알아듣는 정도까지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일상의 대화 속에서 꾸준히 연습하자. 대화가 끝나면 내가 지금 무슨 대화를 했는지 떠올려보면서 핵심을 정리해 보자. 그리고 중요한 키워드나 숫자를 기억해 보자. 이렇게 매일 연습하면 분명히 좋아질 수 있다. 결국은 많이 듣고 많이 정리해봐야 한다. 그게 왕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