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고찰하기
서 과장은 보고서 작성이 늘 일상이다. '타자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는 늘 보고서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직장 라이프를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뭔 놈의 보고서가 이리도 많은 것일까? 전에 있던 팀장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웬만한 내용은 이메일이나 채팅방으로 전달하면 되었고, 심지어 손글씨로 쓱쓱 적어서 소통해도 문제가 없었다. 임원에게까지 가는 보고가 아닌 다음에는 형식이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올해 팀장이 바뀌면서 이런 문화가 싹 바뀌었다. 지금 팀장은 과거 팀장의 소통 방식이 체계도 없고 주먹구구식이라고, 이건 팀도 아니었다고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리고 본인에게 올라오는 모든 건들은 다 보고서로 규격화해서 갖다 바치라고(!) 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상소문 수준이다. 왕 대접을 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 바람에 서 과장은 죽을 맛이다. 보고서 쳐내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러다 보니 야근은 일상이고 주말에도 일을 해야 하는 판이다. 늘 퇴근하고 집 현관문을 열면 가족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가족들 깨울까 봐 까치발을 하고 조용히 방에 들어가는 것이 서 과장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살기는 너무 싫은데 하루하루가 너무나 괴롭고 힘들기만 하다.
보고서만 잘 써도 회사에서 함부로 내보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보고서는 회사에서 공식적인 업무 소통 방법으로 취급받고 있다. 높은 직급에 있는 사람일수록 정형화된 보고서로 보고 받는 것을 좋아한다. 자기가 대접받는다는 생각이 들기에 권위적인 리더들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써서 바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은 너무나 시간과 정성을 많이 뺐어가는 업무이다. 도표부터 그래프, 톤 앤 매너 등등 신경 써야 할게 한 두 개가 아니다. 더구나 한 번에 통과되는 보고서는 드물다. 이 건 이렇게 고치고, 이 도표는 더 키우고, 이 수치도 추가하고 등등 리더의 요구사항을 바꾸다 보면 최초의 보고서는 온데간데없고 덕지덕지 누더기가 되고 만다.
보고서로 소통하는 조직은 답이 없는 조직이다. 모든 의사소통을 그렇게 해버리면 팀원들은 죽어난다. 다른데 써야 할 에너지가 모두 보고서 작성에 투입되고 결국 보고서 다 쓰고 남은 시간 쪼개서 다른 업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야근의 일등 공신은 바로 보고서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요즘은 많은 회사들이 보고서 간소화를 주장한다. SK그룹은 '원 페이지 보고서'를 강조하며, 한 장이 넘어가는 보고서로는 보고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한 장 보고서로 바뀌었다고 보고서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까? 그건 절대 아니다. 그 한 장에 핵심만 욱여넣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에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고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의사결정 해야 하는 사항들은 늘어만가고 꼼꼼히 이거 저거 다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부족하다. 핵심만 추려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회사업무에 다 보고서가 필요할까? 절대로 그건 아니다. 대다수의 업무들은 빠르게 핵 심한 추려서 이메일로 보고하고 바로 의사결정받고 진행하면 된다. 굳이 형식을 다 갖춰서 표에 그래프까지 넣어가며 필요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이는 심각한 자원 낭비이다.
그렇다면 모든 업무를 보고서로 만들어서 보고하기를 바라는 리더들의 심리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빠른 시간 내에 내용을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제일 크겠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이 정도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대접받고 싶다는 심리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내가 그토록 고생해서 보고서를 밤낮없이 만들었는데, 이제 나는 보고하는 위치에서 보고받는 위치로 바뀌게 되었다.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기도 하고, 높은 위치에 올랐으니 권력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신변 때 못된 선임에게 시달렸던 사람이 선임이 되면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싶고, 호되게 시집살이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자기가 그토록 싫어했던 시어머니와 똑같아지는 현상과도 같다. 보상심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악순환은 끝나지 않고 보고서 문화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보고서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임원보고 등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보고서 작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 글이 지적하는 것은 보고서를 지나치게 많이 요구한다는 점이다. 굳이 보고서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경우까지 보고서를 요구하여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고서 작성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고서를 꼭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쓰지 않도록 원칙을 정하자. 신제품 출시, 월별 실적 보고, 대리점 현황 등 팀에서 보고서를 써야 하는 상황을 정하여 그 경우에만 원칙적으로 보고서를 쓰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서 퇴출 제도를 운영하면 좋다. 정기적으로 현재 작성되고 있는 모든 보고서 목록을 검토하여, 꼭 보고서로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건은 과감하게 폐지하자. 보고서라는 게 한번 만들어지면 관행이 되어 웬만하면 사라지지 않게 된다. 그런 관행을 없애는 것이다.
보고서 작성해 보신 분들은 다들 공감하실 것이다. 무슨 디자이너들이 공모전 참가 작품을 만드는 것만 같다. 폰트는 12에 자간은 좁게로 0.2로 설정하고, 색은 네 가지 이하로만 써야 하고, 표는 규격화된 몇 개 표를 벗어나면 안 되고.. 이게 웃기는 건 각 임원, 팀장마다 원하는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임원이나 팀장만 바뀌면 스타일이 확 바뀐다. 어떤 리더는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는 보고서는 빠꾸 시키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현대카드 사례는 좋은 예시이다. 현대카드는 불필요한 디자인 꾸미기에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PPT 대신, 간결한 텍스트로 보고하는 것을 권장한다. A4 한 장 보고서 양식을 도입하여 간결한 보고를 유도하는 것이다.
매일/매주 작성하는 정기 보고서는 시스템화하여 굳이 디자인 신경 쓸 것 없이 핵심만 적도록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이 사항이 발생했을 때만 보고하도록 하여 불필요한 반복 보고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프로젝트 진척도, 이슈, 결정 사항 등을 협업 툴에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공유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자. 노션(Notion)이나 팀즈(Teams) 이런 도구를 활용하면 다 같이 사용하는 엑셀파일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사가 별도로 불러 보고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간단한 중간보고나 의견 교환은 보고서 대신 이메일이나 채팅 또는 짧은 미팅을 통해 진행하도록 하면 보고서 부담을 확 줄일 수 있다. 문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다른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하루 8시간 동안 일하고 쉬는 워크 앤 라이프(워라밸)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주말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주범은 과연 무엇일까?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 중 하나가 잘못된 보고서 문화이다. 디자인 공모전에 출품하듯이 규격화되고 화려한 보고서를 원하는 리더들이 아직도 많다. 그렇게 틀(?)가 갖춰진 보고서가 아니면 보고조차 받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왕인줄 아는 것이다. 나도 주니어 때 그렇게 했으니 너네도 그렇게 굴러봐라 이런 마인드를 가진 것이다.
보고서는 물론 필요하다. 윗사람들이 의사결정 하는 것을 돕기 위해 보고서는 필요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보고서를 남발하는 문화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외국 회사들도 보고서를 많이 작성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디자인이나 규격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다. 내용이 중요하지 굳이 그런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당장 이 뭐 같은 보고서 문화를 바꿀 수 없더라도 의사결정권을 가진 위치로 올라가면 이 부분부터 꼭 개선하자. 핵심만 간추려서 이메일이던 단체 채팅방이던 남기고 관리하면 일하는 시간이 확 줄어든다. 나부터 실천해 보자. 보고서 문화!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