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리부동한 사람이 되지 않는 방법
민석 씨에게 오 상무님은 빛과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신입으로 이 회사에 들어와서 석 달 동안은 그랬다. 아는 것도 진짜 많으시고, 말도 참 조리 있게 잘했다. 인사관리부터 법률 심지어 IT 관련 지식까지..
그중에서도 민석 씨가 오 상무를 가장 우러러본 점은 '심리적 안전감'에 대한 강의 내용이었다. 오 상무는 이 분야에 있어 국내에서 탑급으로 해박한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HR 외부 세미나에서 그는 수백 명의 청중들을 앞에 두고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구성원들이 자기 생각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조직! 그런 조직이 건강한 곳이고, 그렇게 되어야 팀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민석 씨는 손뼉을 치며 그 강의를 들었다. 하나하나 구구절절 뼈를 때리는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일주일 뒤에 벌어졌다. 부문 회의 시간이었다. 오 상무는 전체 팀장들, 과장 이상 팀원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희망 퇴직자 후보군 하나 제대로 정리를 못해? 내가 한 달 시간을 줬는데 왜 진행된 게 별로 없어?"
"이게 노조 반발도 극심하고, 이미 재작년에 한 차례 희망퇴직을 했던 터라 나갈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간 상태입니다"
"그럼 나한테 미리 그런 말을 하던가.. 이제 와서 핑계대기 바쁘네? 일을 그 따위로 하고 있어. 사장님이 나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돼?"
오 상무는 허공에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커피 심부름을 하던 민석 씨는 우연히 이 모습을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이게 바로 오 상무님이 강의 때 그렇게 강조했던 심리적 안전감이었다는 말인가.. 상무님은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런 사람이었구나'
이 글을 읽으시면서 '내 주변에도 오 상무 같은 사람이 있는데?' 이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이다. 세상 좋은 말은 다 하면서 정작 그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역사상으로도 이런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큰소리쳤으나 뒤로는 그 누구보다도 그 나쁜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이었다.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라는 이름은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일반 의지'에 따라서 국가권력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인민주권론을 주장한 철학자였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는 그는, 사실 교육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에밀'이라는 책을 통해 아이의 각 시기마다 필요한 교육이 있고 때에 맞게 적절한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각 시기마다 필요한 교육이 있는 반면에, 해서는 안 되는 교육도 같이 언급하였다. 에밀이라는 한 아이를 가르치면서 나이대별로 하나씩 팁을 제시하는 루소의 책은 큰 화제가 되었다.
프뢰벨, 페스탈로치, 몬테소리 등 유아 교육을 강조하던 후기의 학자들이 기본으로 삼은 책이 루소의 에밀일 정도로 그의 책은 시대를 뛰어넘은 명저였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교육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인식되는 에밀, 그렇다면 루소는 자기 자녀들을 에밀의 내용대로 키웠을까? 절대 아니었다.
루소는 다섯 명의 자녀들을 파리의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당시 고아원은 영양실조와 학대가 만연한 곳으로, 인권침해의 온상이었다. 루소는 교육학자였고 나이대 별 필요한 교육을 그토록 강조했으면서도, 정작 자기 아이들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고아원으로 죄다 보내버렸다.
루소의 이런 행동은 당대에도 큰 논란이 되었고, 볼테르 같은 철학자는 루소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십 년이 지난 후 루소는 아이들은 다시 찾으려고 했지만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찾았던 것인지, 주변의 시선 때문에 대충 찾는 시늉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의 교육을 강조하면서, 자기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겨버리고 결국 생사조차 모르도록 만든 비정한 아버지, 그가 바로 루소였다.
'칼 마르크스(Karl Marx)'이 사람 때문에 전 세계에서 1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히틀러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19세기 철학자였던 그는 자본주의를 극도로 증오했다. 유물론을 신봉했던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일하는 것만을 노동으로 보았다. 자본가는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큰돈을 벌어가기에 인민의 적이라고 규정하였다.
모든 인민들은 계급투쟁을 벌어야만 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자본가, 지주, 왕, 귀족들은 무장 투쟁을 통해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한 이 말은 착취당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공산주의가 전 세계를 파고들며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게 된 배경이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 차별을 없애는데 앞장섰을까? 전혀 아니었다.
그 어떤 계급도 부정했고 차별도 부정했지만, 그는 그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 데무트를 함부로 대했다. 심지어 그 하녀를 강제로 겁탈하여 임신시키기까지 하였다. 데무트가 아이를 낳게 되자 그는 돈 몇 푼을 쥐여주고 집에서 강제로 내쫓았다. 그리고 평생 나는 그런 자식을 둔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평등은 마르크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가치일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부가 상속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귀족 출신인 그의 부인이 상속을 받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아등바등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주장했던 것들쯤은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꾸는 마르크스였다. 이런 사상가가 주장했던 공산주의가 모순 투성이었던 것은 다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집요하게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했던 족속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경건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모든 생활마다 이건 해야 하고 이건 하지 말아야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문제는 규칙이 너무나 형식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에는 절대 노동을 해서는 안되었다. 노동이라는 게 가치를 만드는 일은 안 되는 것이어서 길에 침을 뱉거나 백 걸음 이상 걷는 것도 금지할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에어컨이나 히터를 켜거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식일에는 요리도 하지 않고 전날 이틀 치 요리를 한꺼번에 할 정도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하고자 일부러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행하셨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난리가 났다. 병 고치는 일은 노동인데 이걸 안식일에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정작 병 고침을 통해 한 사람을 병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극구 반대했던 것이다.
신앙의 목적은 개인의 자유함과 평안에 있는데 형식에만 사로잡혀 도리어 이걸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은 표리부동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정작 경건을 강조하면서도 뒤로는 돈을 챙기던 탐욕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성전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누군가가 양이나 염소, 비둘기를 가지고 오면 하자가 있네, 품종이 별로네 등 온갖 핑계를 대면서 받기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시세의 세 배 이상 가격으로 제물을 팔았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큰돈을 벌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경건을 내세우며 큰돈을 벌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형식을 그토록 강조했던 것은 그게 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셨고, 이는 바리새인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도록 앞장서게 된 원인이 되었다.
우리는 유명인들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표리부동한 모습을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게 해야 정서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 아이는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시키고는 한다. 앞서 오 상무 사례처럼 밖에서는 심리적 안전감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기 팀 사람들은 쥐 잡듯이 잡는 리더들도 많다.
왜 이런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말을 내뱉는 순간 우리 뇌는 마치 그 일을 이미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도파민을 방출하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상징적 자기완성(Symbolic Self-Completion)'이라고 부른다.
"나 내일부터 다이어트할 거야"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사실 결심만 한다고 살이 빠진다면 이 세상에 살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말을 통해 얻는 심리적 만족감에 취해, 정작 몸을 움직일 동력은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마치 실천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누구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사회적으로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말을 일단 하고 보는 것이다.
타인에게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내뱉은 말들은 청중이 사라지고 혼자 남게 되면 동력을 급격히 잃게 된다. 타인의 시선이 사라지면 본래 하던 대로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말도 또 없다. 다른 사람이 부조리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세상에 이런 형편없는 인간이 또 있나 싶을 정도로 맹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기 일쑤이다.
루소 역시 자기 자식 5명을 고아원에 보내버린 것에 대해서, 돈도 없는 내가 키우느니 고아원에 맡기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 바빴다. 마르크스는 하녀를 임신시킨 일에 대해서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예 하녀와 아이와의 인연을 끊어 버림으로써 증거 자체를 인멸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내가 한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그저 변명하고 감추기 급급하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다. 도덕적인 사람이래 봐야 얼마나 도덕적이겠는가? 그런 사람이 밖에다가는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늘어놨으니 언행일치를 이루기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도덕성이나 윤리와 같은 내 의지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평소 내 생활습관을 통해 다스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언행일치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말이 앞서기 때문이다. 일단 호언장담부터 하고 결국 자기 말을 주워 담지 못해 큰 곤란에 빠지게 된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지 말고 침묵하다. 침묵은 가장 안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확실하지 않은 계획이나 약속은 아예 입 밖으로 내지 말자.
그리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즉각적인 확답은 피하자. "생각해 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통해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을 확보하도록 하자.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남에게 말할 때, 이미 그 목표를 이룬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실제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성과가 눈에 보일 때까지는 주변에 알리지 말고 혼자 시작하자. 과정에 대해 떠벌리기보다, 결과물이 나왔을 때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아직 제대로 진행 중이지 못할 때 미리 공개하는 것은 오해를 사기 쉽다.
"나는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 이렇게 말해놓고 내가 약속에 10분 이상 늦으면 그것만큼 참 난감한 상황이 없다.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내 생각을 말해놓고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자.
기억력은 생각보다 믿을 게 못된다. 20일이 지나면 단기기억에 저장된 기억의 80%가 사라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가면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내가 한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기억나는 게 없으니 왜 나를 비난하는지 이유도 모르게 된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 오늘 무엇을 하겠다고 했는지 기록하자. 그래서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늘 행동하며 살 수는 없다. 필요에 따라 행동이 바뀔 때가 종종 벌어지고는 한다. 외화 낭비하면 안 된다고 해외여행 가는 사람들을 머리가 빈 사람들이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회사에서 미국 지사에 일주일 간 출장을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온 후, 선물을 한가득 사 왔다.
이때 사람들이 그토록 외화 낭비에 부정적인 사람이 왜 미국에서 외화를 그렇게 많이 쓰고 왔느냐고 말한다면 어떻게 답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일까?
1) 나는 여행이 아니라 출장을 다녀온 거고, 남들보다 더 적게 산 거야. 어쩔 수 없었다고.
2) 이게 외화 안 쓸 수가 없더라고. 그동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게 있었나 봐.
2번처럼 말하면 사람들이 비난할까? 그렇지 않다. 핀잔은 주겠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1번처럼 계속 변명한다면 간단하게 넘어갈 일을 논란을 만들게 되고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람인 이상 모든 말을 지킬 수는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생기면 변명 대신 "내가 말한 대로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세상이 내 생각과는 다르더라" 이렇게 빠르게 인정하자. 그러면 대부분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게 된다.
정치인의 경우도 지키지 못하는 공약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이 말을 했지만 도저히 못 지킬 공약이더라. 죄송하다" 이러면 되는 것을 구질구질하게 "나는 하고 싶은데 예산이 부족하고 지역사회에서 반대가 심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정치인은 신뢰를 잃게 된다.
장 자크 루소, 칼 마르크스, 바리새인들.. 이들의 공통점은 겉과 속이 달랐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각 나이대 별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루소, 계급에 따른 차별을 무력으로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마르크스, 신앙에 따른 경건하고 바른 삶을 강조했던 바리새인들.. 그러나 이들의 실제 삶은 자기주장과는 판이했다.
다섯 명의 자녀들을 고아원에 보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생사조차 모르게 만든 루소, 자기 하녀를 임신시킨 뒤 쫓아내 버린 마르크스, 경건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돈을 착복하기 바빴던 바리새인들.. 이들의 모습은 과거형이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정치인들 같이 사회 지도층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들이다.
말과 행동의 일치..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이다. 항상 말을 신중하게 하고 내 가치관에 반하는 말은 하지 말자. 못 할 것 같은 일은 아예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자. 그리고 내가 한 말은 기록하자. 그래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내 의지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사람은 불리하면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다를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게 신뢰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명심하자.
위선자.. 참 무서운 말이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