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단순히 저장이 아니라, 나를 있게 하는 근원적 두뇌활동의 산물이다
며칠 전 “타자의 추방”이라는 얄팍한 책 한 권을 골라 들었다.
한병철의 글이다. 몇 해전 내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언제나 마음을 움직인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세상을 향한 그의 마음이 잘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세상을 향해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지만, 깊이 있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5년 전부터 “외장형 두뇌의 시대”라는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눠 오고 있었는데, 그 주제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적는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인간의 "기억"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활동을 단순히 "저장"이라는 메커니즘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린 학생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급격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개방성(상시적 접근이 가능한)>은 대화와 장면은 물론 일상적으로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저장하고 언제라도 손쉽게 불러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찾아보면 되는 것들의 경우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됨과 동시에 기억이라는 두뇌활동을 통해 유형화되고 강화되며 개념화되거나 혹은 개인의 정서가 되는 개별적 두뇌활동을 건너뛰거나 축소한다는 측면에서 더욱더 심각하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저장된 내용들은 공유되고 유통되면서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자신의 것이 되기도 하고, 나의 저장 리스트가 되면서 마치 그것들을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과정을 통해 유형화되고 강화되거나 개념화, 혹은 개인의 정서가 되는 개별적 두뇌활동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말처럼 ‘타자를 본의 아니게 추방하게 되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너와 나, 그리고 장소와 시간이라는 물리적, 공간적, 인문적 한계가 만들어내는 보호막으로서의 <다름>이, 극대화된 개방성으로 인해 사라지면서 나타나게 되는 병리가 바로 경계가 되는 <다름>을 소멸시킴으로써 벌어지는 <노출>의 폭력이지 싶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 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한병철/타자의 추방 중에서
기억.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장면 혹은 상황을 끌어내는 행위…
그런데 인간의 두뇌에 의존하고 있던 기억이,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서비스의 등장으로 증강되거나 연장 혹은 공유되면서 우리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상황들을 마주하고 있고, 일견 "새로움과의 조우"가 가져오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부정확한 나의 기억을 좀 더 오래, 정확하게 그리고 ‘보강하여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단계를 조금 더 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관되는 기억과 그것의 호출을 과연 <기억>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일정한 과제를 주고 해결하게 할 때, 특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게 할 때, 나는 많은 안타까움과 공포를 느낀다. 학생들 대부분은 자신이 이해하여 아는 것과 그저 검색하여 스크랩한 것에 대하여 구분하지 못하거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 더 깊은 사고가 필요한 경우 학생들은 깊게 생각 하기보다 좀 더 자주 검색하는 것으로 문제를 하결하려 하는데, 검색의 결과를 붙여 넣는 것으로 거의 모든 준비를 끝낸다. 설령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에 맞는 내용을 검색할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전달자로서 전달할 것이지만, 언제나 소환하거나 검색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결과들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혹은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고민스러운 것도 현실이다.
외부에 저장된 기억.
언제든 어디서든 필요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두뇌를 통해 하고 있는 것과 무슨 차이를 지닐까! 또,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을 공유하고, 증강하여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전통적 의미의 기억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과거 우리는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해왔다. 글쓰기와 같은 문자 기록이 그렇고 사진과 같은 이미지 기록물이 그렇고 영상과 같은 복합적 미디어들 역시 그렇다. 틀림없이 이것들도 우리의 기억을 연장하고 증강하고 공유하는데, 작금의 경우는 왜 더욱더 심각한 것인가 말이다.
과거와 다른 것은 <노출>과 다름 아닌 동시성과 개방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단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팽배하며 세계 각국의 다양성이 크게 훼손되었고, 소위 세계화되면서 벌어진 병폐와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동시성, 광역성, 공유와 개방성 등의 이유로 모든 것이 한 가지의 큰 경향으로 수렴되는 동일성이 정보화시대 이전의 경향과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타자가 없다는 것.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경향만 존재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란 생각이다. ‘나의 기억을 외부에 둔다는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임을 포기하고 공유하여 결국 하나의 경향으로 수렴되는 상황을 맞이 하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같은 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로 변모하게 될지.
그렇다면 모두를 향해 열려있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옮은 것일까?
나는 ‘공각기동대’라고 하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져왔었다.
최근 영화로도 개봉되기도 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뇌(전자두뇌)를 가진 존재가 등장한다. 물론 육체 역시 사람과 구분이 어려울 수준까지 지극히 정교하다. 이들도 인간처럼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 소위 정신이 존재한다. 그러한 존재가 인간과의 사이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갈등 상황이 영화 속에 펼쳐진다. 이와 유사한 시놉시스의 '브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체성과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럼에도 기계인가!
또, 이들이 인간보다 합리적이고 오히려 더 인간적이라면, 이들이 기계의 몸을 입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닌가!
점점 더 인간은 기계와 한 몸을 이루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보조하기 위해 기계를 입기도 하고, 이를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인간과의 인터페이스를 직관적으로 강조하는 등, 다양한 기계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몸에 직접 기계를 이식하거나 하는 경우의 수도 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일반화되고 광범위하게 펼쳐지게 될 때, 어디까지는 인간이고 어디까지는 기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판단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정체성은 물론 윤리와 종교 그리고 인간사회 대부분을 다시 한번 바라봐야 하는 엄중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의 두뇌를 전송받은 인간과 구분조차 어려운 외모를 가진 존재가 <시간>이라는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또, 가장 훌륭한 지적능력과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한껏 품고 있는 두뇌가 공유된다면, 우울하고, 비루한 삶을 통해 축적된 두뇌 속 <기억>과 비교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저울질해 보지는 않을까!
최근 인간의 능력과 경쟁하는 소위 AI 시스템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퀴즈, 체스, 바둑, 기타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그 위세를 점점 떨치고 있다. 엄밀히 이야기한다면 지능이 인간의 지적능력의 전부는 아닐터지만, 그럼에도 이미 인간은 그 탁월함을 선망하고 있으며, 그 탁월함을 손쉽게 이용하기 위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있다. 탁자 위의 것이 이미 손에 들렸고, 이제는 손목에 채워졌으며, 바로 눈앞에 있는 현실이 작금의 상황이다. 또 다른 차원의 현실(가상현실, 증강현실)은 점점 더 현실적인 것을 향해 그 모습을 변모해 가고 있으며 색다른 경험(학습, 모험, 게임, 섹스...)을 무서운 속도로 개척해 가고 있다. 이렇듯 그 탁월함과 광범위함과 순간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좀 더 손쉽게 사용하기를 강요하고 있고 그래서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앞서 말한 전뇌의 소유자나 기계의 몸을 입고 있던 <그 대상>들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작은 혼선들.
자신이 이해하여 아는 것과 찾아 스크랩한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 사이에서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손쉽게 휘발성 강한 것을 선택하려는 경향은 결국 “같음”을 향하여 달릴 것이고, 선망하는 것을 향해 발전해 갈 것이며, 타자가 시라 진 '같음'을 강요하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 사회를 도래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병철의 말처럼 과거 감시사회가 <다름>을 통제하였던 것처럼, 오늘 투명사회는 그 감시를 <제거>함으로 스스로에게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보온병 속의 더운물이 보온병 밖으로 나와 주변과 같은 온도로 변화해 가듯이 그 경계가 제거된 세상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향해 내 달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수구를 주장 하자는 것도, 또 단절을 조장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다름'이 인정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노력조차 없다면, 결국 우리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높은 에너지 수준에서 낮은 에너지 수준으로 변화하며 점차 하나의 것으로 수렴되어 가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변화해갈 것이기에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폐기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경계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