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공급의 시대, 그 속에서 사라져 가는 나의 이야기
우연찮게 들고 있던 볼펜을 바라보다가 "Cool Enough Studio Less Design, More Stories"라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Cool Enough... Less Design, More Stories
정신이 번쩍 든다.
사실, 디자인하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실수 중 하나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처음 생각했던 본연의 이미지는 간 곳 없고, 그저 복잡한 결과물만 남게 되는 경우다. 최근 방송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가수들의 경연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보게 되는데, 가수가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듣는 이들의 감정은 배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과 같이 노래하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 관객의 감정상태나 정서적 여백은 가수에 의해 침해 당하거나 무시 당하게 된다. 역시 과잉공급이 부른 부정적 측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경연에 나온 가수나 참가자도 그렇겠지만, 디자이너도 디자인에 자신감이 막 붙기 시작했거나, 열심히 잘 해봐야겠다는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자신의 생각과 이미지로 프로젝트 전체를 꽉 채우려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겪었을 현실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가끔 펜을 사기 위해 문구점에 가보게 되면 워낙 다양한 종류의 펜들이 넘쳐나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를 정도인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럼에도 "볼펜"을 연상하면 아직도 많은 이들의 경우 '모나미 볼펜'을 떠올릴 게다. 너무도 흔해서 하찮게 까지 느껴졌던 그 '모나미 볼펜'이 오랜 시간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볼펜은 '모나미, 153 볼펜'과 동일한 형태의 볼펜이다. 적혀 있는 문구도 서양 근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의 "Less is More!"를 나름의 이야기로 풀어낸 문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펜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까닭은 스스로의 감정에 치우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거나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메시지가 적절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오래된 평범한 형태의 볼펜.
사실 볼펜의 모양새가 화려하다 하여 좋은 글이 써지거나, 좋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도구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욱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그럼에도, 좀 더 멋진 볼펜으로 글을 쓴다면 좀 더 만족스럽고 좋은 글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자기 만족적 착각에 빠져 볼펜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그렇다고 취향이 중요치 않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필자는 펜에 관하여 욕심이 많은 편이어서 다양한 종류의 펜을 사용하고 있다.
고르는 기준도 까다로워, 모양도 모양이지만, 펜의 무게중심, 그립감, 펜을 구성하는 소재, 필기감, 잉크의 종류, 팁의 굵기, 심지어 브랜드 등 다양한 요소를 기준으로 고른다. 하지만 그렇게 고른 펜으로 늘 좋은 것을 그리거나 써온 것이 아니니, 어찌 보면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운동선수들에게 있다는 일종의 루틴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금 디자인하고 남은 여백에 더 많은 이야기를 채우는 것.
이런 것이 디자인의 완성...
조금만 디자인하고 남은 여백에 더 많은 이야기를 채우는 것.
사실 이런 것이 디자인의 완성이란 생각을 요즘들어 더욱더 많이 하게된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출시하고 제작하여 공급하는 주택들의 경우도 이러한 기준에 적합하도록 노력은 하고 있으나, 경쟁관계의 업체들이 내놓고 있는 화려한 것들에 밀리 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 생각을 지켜가기 어렵게 한다. 또한, 단순하면 저렴하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복잡함>을 부축여 가격을 올리기 위한 타당한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도 싶다. 이찌 되었든 집도 사람이 살 때 완성되는 것이고, 물리적 환경인 집을 채우는 것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일상이니, 강요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싶다.
'Less is More'라는 경구가 회자될 당시는 산업화와 대량생산 등이 시대적인 화두였던 시기다.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활동했던 당시의 건축가들 대부분의 경우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과학과 산업의 기운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들을 모색하였고 그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디자인적 경향이 '장식(ornament)'의 배제 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대적 요구에 따라 배제된 요소들이 사라진 자리를 '본질적 기능'이 채웠을 터이니, 당시의 경향을 어림잡을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함(less)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순화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그 이상의 것(more)일 터다.
대량생산의 시대가 지나고 개별적 맞춤 생산이 가능해진 요즘, 사실 단순화는 시대적 요구가 아니라 개인적 취향의 수준으로 그 지위가 변모하였다. 충분히 복잡하여도, 또 충분히 단순하여도 시대적 가치가 충분히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산업적, 문화적 토대가 갖추어진 요즘 그저 단순함을 주장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 일수 있다. 단순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로 좀더 많은 이야기(story)를 이끌어 낼 수 있게 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다.
단순함에는 힘이 있다.
복잡함에 묻혀 보이지 않던 이야기들도, 단순함 속에선 자연스럽게 드러나 이야기가 되고, 좋은 추억이 될 그런 토양이 되니, 단순 디자인의 힘이 이것이지 싶다.
미술관을 떠올려 본다.
전시벽체는 온통 백색이거나 단색이다.
그림엔 그림을 해치지 않을 만큼의 핀조명이 걸려있고, 오직 그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그 그림은, 풍경이 되기도 하고, 격정이 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되기도 하고, 우리의 깊은 내면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