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잘 드는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 한 장을 경계로 밖은 참으로 분주하다. 폭이 한걸음 남짓한 화단을 옆에 둔 창 앞으로 폭 좁은 테이블이 길게 놓인 자리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커피를 주문하고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주섬주점 가방 속을 뒤져 책 한 권을 꺼냈다. 벌써 6개월여를 가방 속에서 방치되었던 책이다. 아마도 그 책은 철저하게 내 허영과 과시에 의해 그리 오래 가방 속에 있었을 책이다. 없으면,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읽기에는 머릿속이 번잡스럽기만 한…
아무튼, 오늘은 그 책을 꺼내 들었고,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호사스러운 외출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을 먹고사는 일에, 불안한 내일의 먹거리에, 미래에, 우울함에, 자책에, 그리고 잘못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회한에…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랜만에 탈출한 전업주부의 어설픈 나들이처럼, 내가 지금 그렇다.
어제 갑작스럽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오래도록 연락이 없던 대학동기녀석의 전화다.
어찌 지내느냐는 짤막한 인사뒤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내일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서둘러 그곳엘 다녀오던 참이다.
건설 현장이다.
그래서 미안스럽게 건넨 말일 터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이랴. 지금 내겐 생존의 문제가 바로 ‘일’ 인 것을.
짧은 인터뷰를 뒤로하고 곧바로 되짚어 집으로 향하던 길에 잠시 다른 방향을 잡은 것이다.
돌이켜 보면, 올 한 해… 잘 버텼다 싶다. ‘사람’과 ‘돈’. 그것이 만들어내는 지옥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된 한 해이기도 했던 올해, 이만하면 잘 버틴 것이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주문처럼 곱씹는 생각이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곡이 사뭇 비장하게 흐른다. (나중에 찾아보니 “세상 끝에서의 피아노”라는 앨범의 곡이었다.)
맞다.
비장한 맘으로 시작한 한 해가 비참함을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밖에. 마음은 몇 번인지 모를 만큼 무녀 져 내렸고, 매번 그것을 추스르느라 수없이 앙다물었던 어금니. 쓰고 시린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젠, 어쩌지….’했던 순간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하듯 밀려들던 그 난감한 순간들.
세상 끝에 섰던 순간들이지 싶다.
이내, 긴장이 풀어지고 무언지 모를 포근한 곡이 흘러나온다.(같은 앨범의 ‘그리움은 눈부시다 ‘라는 곡이다.)
내게 그리움은 무엇일까?
‘그리움’.
너무도 쉽게 궁핍함에 매몰되는 내 생활의 허약한 채질은 전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기대어 살아온 결과일 터다.
마치 빚도 자산인양, 빚 권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을 미덕이라 생각했던 내 삶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인 게다. 이젠 그 자본이 군주가 되어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나를 흔든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걍팍하며, 건조하고 강마른 하루하루를 지내는 처지가 되었고. 그런 가운데 내게 ‘그리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풍족한 돈, 혹은 행복했던 과거 그 어느 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내 미래의 어느 순간, 그도 아니라면 자본으로 덧칠해지지 않은 본연의 삶. 무엇이 되었든, 그리움을 가질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음은 분명한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사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득하다. 뜨거운 커피 한잔이 식어가고 그 식은 커피를 다 마셔 바닥이 드러나도 여전히 감미로운 피아노 곡은 계속되고 있다.
참으로 비 현실적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 중 상황과 음악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강렬한 주제처럼 내가 앉았는 이 자리가 지금 그렇다. 어느새, 햇살 잘 드는 창가에 햇살은 가셨고, 겨울 거리의 황량함과 움츠린 어깨들의 빠른 발걸음 만이 이어진다.
흔히 말하듯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듯 내일 이 자리에는 또 그렇게 햇살이 들것이고, 누군가 나처럼 그 온기에 기대어 잠시나마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풀어낼 것이겠지만, 겨울날의 짧디 짧음이 아쉽고, 조 금전 그 햇살이 아쉽다. 인생의 추운 계절, 그래서 햇살처럼 값 없이 그저 공평하게 던져지는 그 온기가 아쉽고 그리운 것이 되는 모양이다.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낯설기만 한 나들이처럼,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궁극적 에너지로 바꾸어 가야 할지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