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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SMIN Sep 17. 2020

읽기

또 다른 세상으로의 출구 혹은 입구

기는 뜨거운 마음과 설렘,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압박을 이겨낼 수 있는 치트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다는 사실이 지겹고 답답하며, 때로는 그 낯섦에 현기증과 울렁증이 동반된다. 


무엇 하나에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지켜낸 일관된 경험이 없는 나는 거의 모든 일에 쉽게 지치고 실증 내며, 조금의 난관이라도 있을라 치면 이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설 핑계를 찾는 것에 몰두한다. 그런 내가 읽기를 논하고 있다. 


누구나 나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긴 시간을 그것도 열정을 가지고 한 가지 일을 지켜가고 있는 이들을 볼 때면 상대적으로 나의 한계와 태도에 절망하게 된다. 막연한 희망과 모호한 나의 태도가 처음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내 한계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여전히 깊이에 대한 내 한계와 표피적 행동들이 문제가 되어 왔음이 명백해진다. 


단지 삶의 방식인지 내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자의적 행위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읽는 행위가 나를 정의할 수 있는 한 가지 장점이 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도 아니라면 모든 것을 잃었다는 박탈감과 그것을 보상할 방법으로 허기진 영혼을 채워볼 요량의 자구책 일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이건, 현재 나의 읽기는 진행 중이다.   


사진을 찍듯 스치며 지나는 수많은 문자들이 이미지처럼 지나기도 하고 그것이 눈길을 사로 잡기도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에 불과하다. 그 단어들이 내게 이야기를 걸거나 구체적 형상으로 그려지는 일이 가끔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내용의 뛰어남 때문이라기보다 머릿속이 비교적 덜 복잡한 한 순간에 해당한다. 


읽기와 집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이건만 여전히 나는 온갖 것들의 잡스러움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문자들의 나열을 억지로 눈에 구겨 넣듯 하며 나의 한계를 아쉬워한다. 그렇게 출근과 퇴근 시간은 투쟁과 포기 그리고 다시 한번의 시도가 교차되는 생존의 현장이 된다.  


단순한 마음으로 혹은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읽기"라는 도전에 늘 패배하였다. 처절하거나 혹은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시간의 압박감이나 잡스러운 생각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한 자구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이 과정 역시 그러한 과정 중의 하나이지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래도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근과 퇴근이라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내게 하나의 해방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매일 주어지는 시간은 족히 세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을 오롯이 모두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고, 그것을 활용할 한 가지 방법이 읽기인 셈이다. 


읽기는 또 다른 세상으로의 입구일 수 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세상으로부터 출구 일수도 있겠고. 심적 압박과 번잡함이 정신은 물론이고 몸까지 점령할 때 출근 시간은 나에게 출구가 된다. 적어도 내일을 위해 오늘 일 할 수 있는 장소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니 그렇고, 무료한 그 시간 애매한 시선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 썩지 않아도 되니 나름의 이점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안, 출근시간의 풍경은 가히 기괴하다. 모두가 마스크를 한 모양도 그렇고 또 모두가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그렇다. 


다수의 풍경은 보편적 익숙함일 수 도 있겠지만, 요즘 내 눈에는 기괴한 현상이며, 두려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두가 저렇게 동일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면에서 보면 나의 나다움을 찾기 위한 여정중 하나가 읽기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읽기는 다른 이들의 생각과 정신을 읽는 행위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다른 이들의 모습, 타자의 정신은 나를 비추는 정확한 거울이 되니 나를 명확히 보는 일이 될 터다. 휴대전화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소위 정보는 읽기가 아닌 브라우징이다. 브라우징은 소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조금씩 풀을 뜯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하철 안 대부분의 이들의 행동은 동일하다. 재빠른 손동작과 그것을 쫏는 눈동자의 움직임.  


읽기는 적어도 그러한 모습에서 나를 벗어나게 하였다. 대단한 성취나 획기적인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매일매일 강재적으로 주어지는 그 시간이 때로는 의미 있을 수도 있겠고 또는 그렇지 못할 수 도 있겠지만 지금의 이러한 환경이 가능한 동안 만이라도 나의 이 싸움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행위에 대한 서사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독려하고 생존하고자 함인 것이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다. 동해안에서 서울로 생선을 운반할 때 성질이 급한 물고기들은 운반 도중 쉬 죽는다 한다. 그런데 그 운송차량 수조에 천적을 한 마리 넣어두면, 제 성에 못 이겨 죽던 물고기들이  살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어느 사이엔가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이야기다.   

읽기를 통해 나는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 짐을 느낀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페이지가 거울이 되어  일그러지고 왜곡된 내 모습을 보게 되며, 현재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갖은 계략에 몰두하는 비루한 한 남자를 보게 됨은 물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가장의 모습도 보게 된다. 희망의 뒤 꿈치를 잡아 끄는 현실의 무게가, 같이 수장되기를 매일매일 강요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읽기는 마치 천적처럼 내 내면을 속속들이 파고들며, 생존에 대한 의지를 싹 틔운다.  


인간을 제외한 보통의 생명이라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살아가기 위해 활동한다. 인간만의 그 난관을 극복한 것에 대한 서사를 위대하게 여길뿐이다.  


나는 그 보통의 생명들의 활동이 읽기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 퇴근을 쓰기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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