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비겁함에 대하여
어린 왕자!
너의 아저씨(생 텍쥐베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더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동무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동무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동무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1억 원짜리 집을 보았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 하고 감탄한다.”
무소유(법정스님의 글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며, 언제 내가 이렇게 되었지…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게 되었다.
정말 그렇다.
어른이 된다는 것.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어른”에 대한 정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지 싶다.
몸이 크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유흥업소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고 해서, 성인용 비디오를 보고 싶을 때 제약없이 볼수 있다 해서, 결혼을 해 가장이 됬다 해서, 혹은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또 직장에서 고위직에 올랐다 해서…
그렇다고 해서 정말 다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아이’같은 사람들을 옹호하거나 그렇게 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피터팬처럼 어른 사회로부터 ‘나만의 공상의 섬’을 찾아 떠나 버리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몸이 자라고 맘이 자라면, 꿈이 떠나고 정서가 메마른 다는 무슨 법칙이나 섭리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닐 터인데, 또 내가 원해서 얻게 된 ‘어른’이 아님에도 어찌어찌해 ‘어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면, 모두가 한결같이 그렇게 변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라고 하는 공동의 집단 속에서, 혹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속에서 맺어진 관계와 가치를 가늠할 줄 알게 되었다는 면에선, 소위 ‘어른’이라는 정의가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디 사람 사는 모양새가 그것뿐이랴…
혹여, 어른이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편리함’에 내 영혼을 넘긴 것은 아닌가 살펴볼 일이다.
연장자가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우선권과 성인이 가질 수 있는 무한의 쾌락,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하는 수 없지…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 통계적 기준을 통해 사물을 관찰하고 가늠하는 간편한 판단법, 어른이 무슨… 하고 넘겨 버릴 수 있는 무책임…. 어른이 되면서 얻을 수 있는 편리함에 조금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 하여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가슴, 또 내 주변에서 보게 되는 작은 행복들을 헐값에 넘겨 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 볼 일이다.
가늠하기 힘들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며, 비싸지 않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닌데… 우리는 어느덧 간편한 계산법과 그 편리함에 흠뻑 취해 버렸는가 보다.
어쩌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라는 말로, 남 탓만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내게 화두처럼 주어진 말이 있다.
내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