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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Jun 21. 2022

아무튼 할머니 /신승은/제철소

지하철에서 읽는 책


  어릴 적 나의 형제들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농사짓는 시골에서 엄마 아빠는 늘 바빴다. 할머니는 손주들 밥도 챙겨주고 학교에서 부모님 모시고 오라면 엄마 아빠 대신 오셨다. 곱게 쪽진 머리에 한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오면 난 고개를 숙였다. 유난히 숫기가 없었던 나는 할머니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날은 내가 새로 산 운동화를 잃어버린 다음 날이었다. 할머니는 담임선생님을 만나. 내 운동화를 찾아 달라고 한 듯하다.


할머니는 때로 무서웠다. 어느 겨울날 한약을 약탕기에 담아 연탄 부뚜막에 올리고는 들어와 누우셨는데 나한테 다 끓었는지 부뚜막에 가보라고 시켰다. 난 부엌으로 가서 약탕기를 보았지만 다 달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약하게 김이 올라오긴 했기에 난 들어와서 잘 달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부엌에 들어간 할머니는 갑자기 호통을 치셨다. 약탕기에 약이 모두 타버렸다.


할머니는 저녁에 일찍 주무셨는데 이부자리를 깔고는 우리에게 노래를 하라고 시켰다. 여자는 빨강 내복 남자는 회색 내복을 입고 잤는데 언니와 나는 일어나서 두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서로 할머니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실랑이를 벌였고 내가 늘 이겼다. 언니가 져준 거다. 할머니 품은 따뜻했다.


<아무튼 할머니>를 쓴 저자도 어릴 적 할머니와 추억이 많다. 멋진 할머니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셨다고 한다. 미신을 잘 믿었던 할머니의 주문대로 저자는 문지방을 밟지 않았고 아침에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모르는 할머니들은 서로 장바구니를 들여다보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무얼 그리 많이 사셨냐고 하면 이것저것 샀다고 이야기를 한다.


저자는 나이 들어도 멋진 삶을 살고 있는 박막례 할머니와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를 언급한다. 힘들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영상은 큰 위로가 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거 한번 해볼까? 그러면 남들이 그걸 못 하게 하는 거야. 너는 하면 안 돼. 그러는 수가 있어. 그러는데 그 박자에 맞추지 말어.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해. 내 인생철학은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예요."(128쪽)


나이 아흔이 넘어도 작품 활동을 하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은 동물권 낙태죄 반대운동 페미니스트 활동을 하며 저자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몇 살부터 할머니인지 모르겠지만, 장래희망은 할머니입니다."(65쪽)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그림 그리는 할머니, 음악 하는 할머니, 글 쓰는 할머니.


나이 들면 저절로 할머니라 불리겠지만 적어도 수식어가 붙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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