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컨추리우먼 Jan 10. 2023

세탁기에 고함

느낌 있는 일상


아침에 눈을 뜨니 뜨악 7시가 넘었다. 어제 월요병이 힘들었나 보다. 퇴근길에 가전 매장 들러서 통돌이 세탁기를 샀다. 일요일 저녁에 세탁기가 갑자기 고장 나서 젖은 빨래를 들고 세탁방에 갔고 막내는 세탁방에서 빨래하고 난 인근 가전 매장 두 곳에 들러 어떤 물건이 좋을지 둘러보았다. 드럼이냐 통돌이냐 고민이 되고 엘지냐 삼성이냐도 고민이 되었다.


 


결국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세탁방에 가서 막내와 세탁물을 집으로 가져와서 건조대에 널었다. 무거운 빨래를 들고 다니면서 어릴 적 개울가로 빨래하러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 집 빨래 당번이 나였다. 처음에 마른빨래를 들고 갈 때는 가볍지만 다 한 뒤에 젖은 옷을 담아 올 때는 엄청 무겁다. 꼭 짜지 않으면 더 무거우니 있는 힘껏 비틀어 짜서 가져와야 한다. 집에 들어와 빨래를 널면서 무거운 빨래를 척척 돌리는 세탁기가 고맙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이상 잘 돌았는데 이제 멈추다니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젠 수명이 다 되었으니 바꾸어야 한다.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건 통돌이다. 있던 자리에 새 제품을 두면 되니까. 사이즈도 기존 거랑 비슷한 제품이 있길래 엘지매장으로 가서 20킬로짜리로 달라고 했다. 잠시 드럼세탁기를 고민하긴 했지만, 사용설명서를 익혀야 하니 귀찮기도 하고 세탁실 구조상 앞으로 문을 열면 공간이 나오지 않을 거 같았다. 근데 20킬로짜리는 재고가 없단다. 요즘에는 외국에서 만들어서 완제품이 들어오는데 연초라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다.


 


“그러면 25킬로짜리는 재고가 있나요?”


“네, 그건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보내주세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난 조용히 카드 결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에게 세탁기 주문하고 왔다고 말하며 기운 없으니 김치전이나 해달라고 주문했다. 막내는 아빠를 닮아 요리를 잘한다. 막내는 밀가루와 신김치를 꺼내더니 팬케익 사이즈로 김치전을 고소하게 만들어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김치전을 먹으니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막내는 내게 혹시 모르니 세탁기를 한번 돌려보자고 한다. 그럴까? 빨래 몇 가지를 넣고 돌려보니 세탁기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세탁기가 회춘했나? 이미 난 새 제품을 주문했는데 취소해야 하나? 막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어차피 노후되어서 바꿔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작동한다. 납품을 늦출까? 그 사이에 또 고장 나면? 빨래방에 가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임진아 작가님의 책 <사물에게 배웁니다>가 생각난다. 작은 커피잔, 쓰는 연필, 앉는 의자, 창문, 커튼, 핸드폰 등등 주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면 소중하지 않은 물건이 없다. 온 집안 식구들 땀 흘려 일한 뒤에 퇴근하여 벗어던진 양말, 세수하고 휙, 머리 감고 휙 던진 수건들, 바닥 먼지 닦은 걸레도 마구 던져 넣고 돌리면 아무 말 없이 깨끗하게 빨아주던 세탁기인데... 이제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고맙다. 그대는 게으른 나를 도와준 멋진 일꾼이었다. 

잊지 않을게...

작가의 이전글 해가 뜨면 달려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