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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Jan 13. 2023

살림살이를 장만하다

느낌 있는 일상


2023.1.13. 모닝 페이지 12일 차


하루 빠진 모페로 인해 날짜와 어긋나는 열차가 되었다. 날짜를 먼저 보내고 숙고한 뒤에 모페를 쓰는 진지한 나를 기대한다.


 


어제는 점심 먹고 조퇴했다. 14년간 사용했던 세탁기를 교체했다. 지난 일요일 저녁에 세탁기가 고장 났는데 어차피 오래 썼기에 수리하지 않고 다음 날 새로 샀고 어제 배송되었다. 원래는 사다리차로 한 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아파트 화단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가지가 걸려 사다리를 쓰지 못했다고 배송 기사가 말했다. 오 나무의 위대함이여.


 


결국 내 방 창문으로 넘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오 마이 갓!’ 그 상황은 미리 생각지 못했던지라 난 몹시 당황했다. 내 방 창가에는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고 책상 위에도, 바닥에도 서류 다발이 잔뜩 있었다. 치워야지 하면서 1년이 후딱 지나갔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배송 기사는 작은 책장만 옮기고 책상 위에 책꽂이는 조금 옆으로 밀면 자리가 날 거라고 했다. 그거면 되는 건가? 방문 고리에는 어제 입던 옷들이 걸려있었고 방문틀 위에는 어제 널어 둔 속옷과 스타킹이 걸린 옷걸이가 있었다. 이런 낯 부끄러운 상황이라니 아파트 화단에 버티고 있는 소나무가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사다리차로 한 번이면 끝날 일이었는데…


 


기왕 내가 집에 있을 때 공기청정기랑 비데 설치도 같은 시간에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쪽에서는 세탁기를 옮기고 다른 쪽에서는 공기청정기와 비데를 설치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신랑에게 전화했더니 주방에 환풍기도, 거실 전등도 교체하자고 한다. 작년 여름에 냉장고를 바꾸었고, 가을에는 텔레비전을 새로 샀다. 신랑은 신혼살림 장만하듯 신났다.


 


26년 전 가을 결혼 날짜 잡고 신접살림 준비할 때 나는 노트 한 권을 마련하여 결혼 전 30일 동안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했는지 기록했다. 계약한 신혼집에 미리 가서 양해를 구하고 창문이며 방이며 치수를 재 왔다. 어린 아기와 함께 살던 엄마에게 음료수를 전했다. 상가건물 4층 옥탑방이 우리 신혼집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하늘이 다 내 것이었다. 옥상 난간 옆에는 보일러실이 있었다. 기름보일러였고 본체 옆에는 200리터짜리 석유탱크가 붙어 있었다. 난방을 가동하면 보일러 소리가 윙하고 들렸다. 보일러 소리만 나도 겁이 나서 난방비를 아꼈다.


 


큰애가 태어나고 아장아장 걸을 때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삿짐을 빼고 나서 난 옥상 난간에 메모지를 한 장 써서 돌로 눌러놓고 왔다. 메모지에는 세탁소, 기름배달 집, 비디오 가게 등 살면서 필요한 주변 연락처를 적었다. 그러고 보니 난 예전부터 적는 걸 좋아한 듯하다.


 


결혼할 때는 내가 살림살이를 장만했고 신랑은 돈 한 푼 쓰는 걸 아까워하더니만 26년이 지난 지금은 신랑이 더 적극적이다. 짠돌이 신랑이 조금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하여 내 마음도 편해진다. 이번 주말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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