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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컨추리우먼 Nov 25. 2021

냄비처럼 끓어오르다 식을 때

25년차 직장인

냄비처럼 끓어오르다 식을 때   

  

어떤 일로 화가 날 때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부글부글하다가 가라앉으면 화를 낸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상급 기관에서 주관하는 패널 토의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아 수락했습니다. 토의 주제는 자유롭게 해도 된다 해서 저는 나름 고민해서 제출했습니다. 온라인 토의라 실시간 영상이 각급 기관에 전송되므로 저는 주말에 자료수집도 하고 시나리오를 작성해서 녹음도 해보고 연습을 했습니다.   

  

내일이 행사 날인데 퇴근 무렵에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내부적으로 협의한 결과 토의 주제를 좀 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는 겁니다. 담당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수정된 질문지를 저에게 카톡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주말 내내 제가 만든 질문지와 답변서를 들고 연습했던 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 제가 다시 수정한 질문지를 담당자에게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잠시 후에 장문의 문자가 왔습니다. 너무 죄송하다면서 이미 시나리오 작업도 끝났으니 어제 보낸 수정안대로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난 꼭두각시였어! 행사가 실시간으로 유튜브에 전송되니 수정도 못 할 거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할 거야.”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유튜브에 떠돌아다닐 영상을 생각하니 아침 일찍 미용실에 가서 머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단골집에 갔습니다. 머리 손질을 마치고 시간이 좀 남길래 속눈썹을 붙여볼까 하니 원장님이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속눈썹을 사 왔습니다. 결혼식 때 붙였던 속눈썹을 이번 행사 때문에 붙이다니 영상이 무섭긴 한 거 같습니다.     


11시에 행사장에 도착해서 리허설을 하고 12시에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친한 선배에게 제 의상을 찍어 보냈더니 밋밋하다면서 브로치를 달아보라고 합니다. 저는 급히 나가 상가에 가서 오천 원짜리 브로치를 사서 달았습니다. 다시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이번에는 마스크를 검은색으로 바꿔보라고 합니다. 저는 점원에게 마스크를 달라고 해서 바꿔 끼우고 다시 사진을 찍어 보냈습니다. 선배는 이제 되었다면서 차분하게 잘하라는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본 행사는 시나리오대로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연극은 끝났고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보면 주최 측에서 준비한 시나리오가 더 폭넓은 여론을 수렴할 수 있을 겁니다. 냄비처럼 부글부글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이 풀렸습니다. 무사히 잘 끝난 행사장을 뒤로하고 퇴근하는 길에 여기저기서 차분하게 잘했다는 문자와 카톡이 오고, 영상이 예쁘게 나왔다며 신부 화장이라도 했느냐고 누가 물을 때는 준비한 보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그런 직장생활에 온라인 패널 토의자로 참석해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힘들었던 시간은 보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날에 뜨거웠던 냄비는 사라지고 저는 이 사람 저 사람이 찍어 올린 사진에 넋이 나간 가련한 중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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