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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Sep 25. 2021

기억되어야 마땅한 당신의 이름

이름으로 확인받는 자아의 고귀함

지난여름 휴가를 마지막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다… 사실 시간이 그만큼 지난 지 인지도 못 하고 있었는데 꽤나 치열하게 살았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려나? 일상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글감을 찾기 어려웠던 것 같다. 물론 다이어리는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라 브런치에 쓸만한 글감은 되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객관성을 부여해서 논해보고 싶은 주제이긴 한데 앞으로 좀 더 부지런한 브런치 작가가 되려면 열심히 시간 날 때마다 글 쓰기를 생활화해야겠다.


오랜만에 카페에 앉아 브런치 어플을 켰다. 오늘 다뤄보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이름”이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다른 어떤 것과 구별하기 위해 “이름”을 부여받는다. “부여받는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이름은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또는 특정 사물을 위해지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또 다른 표현은 “성명”인데 성은 가계의 이름이고, 명은 개인의 이름을 가리킨다.


우리는 종종 “이름값”을 하라는 말을 하고 듣기도 한다.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에 알맞은 행동이나 노릇을 해야 한다는 은근한 사회적 압박을 받고, 이는 명성이 높은 만큼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개개인마다 이름에서 좀 더 친근함이 추가된 별명이 생기기도 하고 또는 게임이나 SNS에서 사용하는 닉네임 또는 ID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닉값 하라”는 말이 통용되기도 한다. 결국 본인이 대표하는 이미지와 이름의 뜻에 걸맞은 행동을 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름값”은 좀 의아한 표현이다. 내가 스스로 정한 이름도 아닌데 이름값을 하라니. 태어나면서 정해진 이름의 뜻을 자라면서 내면화하고 미리 정해진 운명처럼 그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앞뒤가 안 맞는다.


사실 너무 심각해질 필요가 없는 게 요즘은 나의 의아함이 무색할 만큼 “이름”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보다는 그 사람이 맡은 역할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 그 사람을 호명한다. “사수님,” “팀장님,” “선생님” 등 그 사람의 직책을 나타낼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한다. 또한 직원 간의 계급을 무너트리기 위해(?) 강남 또는 판교 소재의 다수 스타트업에서는 영어 이름을 정해서 서로를 칭하기도 한다. 마치 박 부장님이 로버트 (Robert)가 되면 모든 직업적 계급과 어색함이 허물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터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이름은 그 본질을 잃어가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애틋하게 이름을 부르며 연애하던 철수와 영미도 결혼과 동시에 “애기 아빠” “애기 엄마”가 된다. 속상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고 책임감이 늘어나면서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이름으로 보호되던 자아를 잃어가기 십상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무용해짐을 느낄 것인데 인터넷에서는 오히려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타인에게 가혹한 말을 내뱉고 그렇게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라는 단호함과 함께 수많은 “키보드 전사 (keyboard warrior)”들이 탄생한다. 게임이나 수많은 포털사이트와 뉴스 기사에 대한 댓글, 특히나 악플뿐만이 아니다. 회사 생활에 대한 불만을 익명 커뮤니티에 털어놓을 수도 있고 대학원생들은 익명의 힘을 빌려 특정 지도교수님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서로 서운함이 쌓여 마땅한 일이었겠지만 이는 굉장히 속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귀한 자아를 위해 예의를 지키고 서로 소통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름의 고귀함을 존중하려 노력하고 비슷한 노력을 보이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스스로 익명의 힘을 두려워하거나 내가 내 이름을 특별히 더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물론 나의 경우 내 이름을 특별한 이유 없이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이름은 기억되어야 마땅하고 훼손되지 않아야 하며 이름을 지키는 것이 자아의 건강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이름을 한 번 더 읊어주고 기억해주는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이 더 좋았다.


나는 어렸을 때 해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데 그때는 배려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발음이 어렵지도 않은 내 한국 이름을 제쳐두고 영어 이름을 사용했었다. 학교에 처음 입학한 날부터 영어 이름을 사용하여 자기소개를 했고 그렇게 8년을 그 이름으로 살았다. 딱히 아쉽거나 후회가 들진 않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내 진짜 이름, 어여쁜 한국 이름까지 기억해준 외국인 친구들과 선생님들 얼굴이 더 생각나는 것도 사실이다. 친근감의 표시이자 나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자, 여러모로 고마운 상황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리고 지금 기억났는데 외국에선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Ms 또는 Mr라는 표현과 함께 성을 불렀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정말 많은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교수님들은 이름을 잘 기억해주셨던 교수님들이다. 특히나 대학교 대형강의의 경우 100명이 넘는 학생이 함께 수업을 수강하는 경우도 많았고 교양 수업만 해도 50명이 훌쩍 넘었다. 물론 매번 이름을 기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신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게 출석부에 있는 앳된 증명사진과 당장 당신 앞에 앉아있는 퀭한 학생들의 용모를 비교하시며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해주셨던 교수님들을 존경하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그중 한 분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대학원 생활을 하고 있고, 또 다른 한 분을 위해선 3년째 교양 수업 조교로 일하고 있다. 나는 생각보다 사소한 포인트에 심쿵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그만큼 통성명의 순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요즘엔 익명으로 가능한 활동이 너무 많아서 굳이 이름을 묻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출석이 필요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최근에 다니기 시작한 필라테스 센터에서의 일이다. 내가 처음 요가를 배웠던 선생님과는 엄청난 친밀감을 쌓았었기 때문에 출석 체크도 하지 않고 인원 체크 후 수업이 곧바로 시작되는 필라테스 센터의 차가움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오늘은 어디가 더 아프고, 어떤 동작이 어려웠는지 논할 시간은 조금도 주어지지 않아서 아쉬운 수업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운동 자체는 재밌어서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딱 지난주에는 이름을 물어봐주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수업 도중 평평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나의 등을 얼러 만져주시곤 수업 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제부터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가는지, 혹시 디스크 진단을 받은 적이 있는지 등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서 연습할 수 있는 동작을 알려주셨다. 그 과정에서 통성명도 하게 되고 나 역시 앞으로는 그 선생님 수업만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조금의 차이인데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 이름을 알게 되고 이름과 함께 그 사람의 특징을 기억하는 모든 과정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기구 필라테스 열심히 해봐야지.

해먹에 매달려 있기도 아프고 이름도 어려운 필라테스 기구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을 사용하는 건 더 어렵다… 선생님과 학생간의 유대감이 절실하다.

최근에 접한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에서도 이름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추석 연휴 큰 화제를 불러왔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다. 약간의 스포일 수도 있지만 해당 드라마에서 온갖 고생과 힘든 상황을 겪어낸 어린 두 소녀, 새벽이 와 지영이의 대화에서 통성명이 불러오는 고귀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었다. 타인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기를 꺼려하는 새벽에게 지영은 계속해서 이름을 물어본다. 이유는 “부르기 위해서.” 새벽을 이를 다소 귀찮아 하지만 나중에는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함께 게임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가슴 아픈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서로 이름을 알게 된 것이 두 소녀 간 우정에 얼마나 큰 이정표가 되었는지 나타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에서 지영과 (왼쪽) 새벽 (오른쪽). 게임을 참가하기 전에도, 참가 도중에도 약자이자 소수였던 두 소녀간의 우정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유느님 칭찬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유느님 칭찬이라고 하지만 주제와 부합한 썰이기 때문에 어쩔  없다. 마마무 솔라는 예능 <갬성 캠핑> 출연해 유재석의 미담을  하나 공유했는데 신인 시절 어렵게만 느껴졌던 유재석이 솔라의 연예인 예명뿐만 아니라 실명을 기억해주고    마음을 써줬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유재석의 섬세함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서로의 이름을 묻고, 기억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기억받았다는 뭉클함을 느끼며 자아를 보호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발자국  서로에게 의지하며 나아갈  있는 힘을 얻는  같다. 인생은 하루하루 겪어 갈수록 어려운 날이  많은  같고,  보단 사람이  어려운 경우가 훨씬  많지만  역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디테일을 기억하려는 노력으로 배려심을 보이며 살아가고 싶다. (역시나 유느님이 최고다.)

유느님의 섬세함에 감동했던 신인시절의 마마무 솔라. (캡처 출처: 네이버 블로그, 갬성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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