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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Jan 13. 2022

나의 아직 진행 중인 슬럼프 극복기

잘하는 것 vs 좋아하는 것 중 해당사항이 없다고 느껴질 때

12월 둘째 주 월요일 출근 후, 나의 발걸음은  학교 도서관을 향했다. 반드시 당장 빌려야 하는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은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다.


처음 읽어보는 책이 아니었다. 석사과정을 시작했던 3년 전 여름, 답답한 마음에 같은 책을 빌려 읽었던 기억이 있다. 책을 좋아하고 항상 좀 더 많이 읽는 독서 생활을 지향하고 있지만 내가 같은 책을 2 회독했던 적은 거의 없다,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전혀 없는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칼럼계의 아이돌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님의 조언에 따르면 책은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 그 깊이가 더 해져 새로운 맛(?)을 느껴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시간은 제한적이고, 읽어 보고 싶은 궁금한 책은 넘쳐나고, 게다가 책을 대신할 수 있는 콘텐츠는 매일 홍수 같이 늘어나는 마당이라 아무래도 다회 독은 나에게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깜짝 방문하셨다. 내 마음 또 들킬뻔했지 뭐야.

그렇다면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은 어떻게 그 예외가 되었나?라고 물으신다면 대학원 생활에 있어서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사실 셀 수 없는) 슬럼프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2020년 연말, 덕업 일치를 실현시킬만한 큰 재미와 열정은 부재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에 노력하자는 다짐과 함께 박사과정을 시작했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픽사의 <소울> 영화가 큰 도움이 되었고 말이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2021년 연말을 맞이했던 작년 12월, 오랜 시간 준비하고 기다렸던 논문을 또 한 번(!) 거절받던 순간, 나의 마음은 "앞으로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닌 "아, 정말 못해먹겠다"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꽃 길"따위는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나를 덮치고 말았다. 물론 당장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가시밭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슬럼프에 맞서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환경, 좋은 동료, 좋은 조건이라도 스스로 동기부여를 찾지 못한다면 모든 노력과 고생은 헛일이 되고 만다. 말 그대로 말짱 도루묵이다.


책을 빌리는데 교내 대출 도서 순위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교양 부문에서 무려 인기 도서 4위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 바로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었다. 학교 특성상 이공계 대학원 진학률이 높은 편이라 그런지 다들 진로 고민의 재질이 비슷한 것 같았다. 이런 내적 친밀감이라니... 다들 좋아하는 연구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바람을 갖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순진한 건가 싶기도 했다. 여하튼 해당 책은 엄태웅 박사과정생, 대학원을 졸업한 최윤섭 박사님, 그리고 대학원을 지도하는 권창현 교수님, 이렇게 세 분께서 대학원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입학을 고려할지, 그리고 어떤 노력이 필요하며 대학원 과정 동안 어떤 고민을 하였고 어떻게 그 답과 비슷한 것에 도착한 듯 안 한 듯 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연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작성한 "안내서"와도 같다. 막상 본인은 대학원생이 되기 전에 이 책을 읽지 못했었는데 그 점이 참 아쉽다. 꼭 같은 이공계가 아니더라도 "대학원"을 본인 커리어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저자가 세 분인지라 책 역시 세 파트로 나뉘어 있는데 앞서 언급한 듯이 (책 출간 시점 기준) 아직 박사과정 진행형인 분, 이미 박사과정을 마친 후 연구자가 된 분, 그리고 수많은 박사과정을 지도하는 교수님의 시점에서 공통된 주제, 즉 대학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스스로는 대학원 생활에 대한 충분한 동기부여를 갖고 있는지, 정말 이대로 쭉 하면(?) 되는 건지에 대한 답과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같은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결과는 참혹했다. 프롤로그가 끝난 후 첫 번째 챕터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에서부터 나는 앗 하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에 대한 나의 진솔된 답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원은 지적 호기심과 이에 대한 끈기가 균형 있게 필요한 장거리 레이스이기 때문에 연구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흥미 없이는 긴 레이스를 완주하기 쉽지 않다.


맙소사. 그 정의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성공적인(?) 대학원 생활을 위해서는 첫 번째 지적 호기심, 그리고 두 번째 끈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fundamental) 흥미가 결국 지적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 인생뿐만 아니라 대학원 과정 역시 긴 레이스, 즉 마라톤과도 같다는 생각은 누누이 해왔지만 이토록 긴 여정 속에서 이렇게나 마음이 쉽게, 자주, 그리고 심하게 요동치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던 것 같다. (역시 생각이 짧았던 걸까...) 게다가 대학원 생활은 보상이 잦지 않고 나의 결과물이 가시적이지 않다는 점이 큰 특징인 것 같다. 보상이 흔치 않고 주기도 길어서 내가 잘하고 있다는 이정표 (milestone) 따위는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논문이 게재되고 상도 받고 해외 연수도 받으러 가고 하면 성취감은 상승하겠지만 이정표를 자주 기대하기는 절대 힘든 것 같다, 특히 생명과학/공학 분야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나의 결과물이 가시적이지 않다는 특징은 좀 더 분야 특이적일 수 있는데 내의 시간적, 지식적 투자 (input) 만큼의 산출량 (output)을 기대하기 정말 어렵다. 실험이 잘 되고 있는지는 72시간 정도 후 모든 실험 노동이 끝났을 때나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현성도 (reproducibility) 현저하게 떨어진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지만, 건강하고 포부가 가득 찬 마음으로 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대학원은 쉽지 않은 길이기에 명확한 동기 부여가 (motivation) 필수이다. 다른 길이 더 쉽다고 주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대학원에는 금전적 보상도 턱 없이 부족하고 인간은 '사회적이라는' 양날의 칼과도 같은 운명을 타고났는데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을 맞이하며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스스로의 조바심과도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XX 때문에 이토록 험난한 대학원생의 길을 걷고 있다"는 안심의 (reassurance) 생각 회로가 필수적이고, 당장의 기회비용의 쓴 맛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길을 걷겠다는 당찬 뱃심과 "마이웨이"적 사고 회로가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그 둘 다 없어서 문제인 거고.)


대학원 생활 4년 차에 접어들면서 매일 같이 더 느끼는 점은 "박사"라고 해서 특정 분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척척박사님"이다. 그래서 박사님이 되려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한 명의 지식 생산자, 지식 노동자로서 인류가 궁금해하는,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나의 지적 호기심이 밝혀내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궁금한 지식 한 톨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포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권창현 교수님 역시 말씀하셨다.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을 때는 열심히 하면 대부분 문제가 풀렸다"라고. "연구는 사실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문제 혹은 질문을 찾는 과정이다"라고 말이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위로가 되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직접 대학원 생활을 해보면 느끼겠지만, 대학원 과정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철저히 자기와의 싸움이요, 넘치는 자유 혹은 부족한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자기 관리의 결과물이다.

바로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내가 또 자기 관리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크크. 대학원 생활, 그리고 여기까지 도달하는 모든 과정 자체가 사실 경쟁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지만, 대학원에서는 드디어(?) "찐"으로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더 편할 수도,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스스로 할 것을 찾고,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발전해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단계인 것이다.

지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대학원 생활로부터 얻어야 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닌 삶의 자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삶에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연구를 위해 사용할지, 그리고 그 연구를 오랜 시간 재밌게 잘 지속해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사실 시간도 정말 빨리 가고, 정신 차려보면 연구실에서 고년차 선배가 되어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에서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편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워라밸" 즉 일 (work)과 삶 (life)의 균형 사이에서 "삶"에만 초점이 맞춰진 듯한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취를 시작하고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집에 가는 게 너무 중요하다. 우선순위 1위라고 해야 할까. 연구를 위해, 논문 스터디를 위해 연구실에 더 남아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스스로를 한심해하지만 변할 기미도 의지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문제 삼고 있는 것 같다. 이만큼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데 충분히 내가 할 일들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원인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대한 애정 부족으로 돌리기 시작하면 대학원 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감, 의구심이 증폭되고 만다. 즐기면서 하는 일이라면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아직까지 철이 덜 든 건지, 너무 이상주의적 덕업 일치를 희망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내 마음은 딱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슬럼프를 겪고 있는 것 같다.

귀여운 춘식이 달력으로 연구실에서 머무는 시간을 더 늘리고 버텨보려고 하지만 역시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무언가 잘하는 사람보다 본인의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들이 제일 멋지고 가장 부럽다. 어렸을 때 진로 고민 토크쇼와 같은 현장 강연이나 멘토링 세션에 참가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사이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재어가며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왜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 이런 마음에 대해 주변 대학원생 친구들,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생각만큼 본인의 연구를 "덕질"하며 하루하루 재밌게 실험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거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다들 하기로 한 일에 대한 책임감과 일말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열심히 출퇴근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안정성과 성취감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우선 논문 게재의 맛(?)을 볼 때까지는 열심히 달려보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려나 싶은 마음이 들긴 하는데 당장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멈추기 어려운데, 나를 의심하지 않는 법,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슬럼프에 대한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해결책을 발견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연습해보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하루씩 살기 프로젝트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하루치 계획을 세워서 그만큼을 해내었을 때 스스로를 칭찬해주는 것이다. 더 하지 못했음에 괴로워하고, 분명해야 할 일은 더 많다는 생각에 가상의 '투 두 리스트 (To-do list)'를 늘어놓는 대신 오늘 하루도 연구실에 잘 다녀왔고 자기 돌봄을 위해 산책도 하고, 물도 많이 마시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많이 웃고, 필라테스 수업에까지 다녀온 스스로를 예뻐해 주는 일 말이다. 최근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대화하면서 신기했던 점이 있는데 그 친구는 내가 삶을 돌보는 실력이(?) 부럽다고 했다. 일 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부분에도 취향이 깃들어있고 당장 마감 시간이 급박하지 않아도 꾸준히 성실할 수 있는 것 역시 실력이라고 했다. 나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좀 더 목적성을 갖는 성실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건데 누군가는 이런 나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한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역시 삶은 상대적이고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랜덤한 사진이지만 흔한 교내 학교 풍경. 대학원생 모두 소소한 웃음거리를 찾으면서 지내는 것 같다. 이 땅의 대학원생들 다 화이팅!

이번 글의 제목을 "극복기"라고 당차게 정했지만 사실 "진행 중인" 극복을 위한 노력이라 이렇다고 공유할만한 슬럼프 극복 성공담은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읽게 될 대학원생이라면, 아니 꼭 대학원생이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멀리 서는 온전해 보이지만 모두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 대해 위로를 얻고 오늘 하루라도 스스로를 더 예뻐해 주는 시간을 많이 가지셨으면 좋겠다. 우선, 저부터 연습 좀 더 하다가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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