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고 나서야 비로소 충전되는 의욕의 모순
작심 일일 차,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갑자기 코딩이라니. 많은 사람들이 왠 갑분 코딩? 이냐고 물을 것만 같다. 스스로를 포함해서 말이다. 나의 답은 간단하다. 필요해서다. 그리고 코딩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내 일을 더 잘 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나는 생명공학, 좀 더 자세하게는 RNA 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대학원 연구실은 아주 크게, 그리고 이분법적으로 (dichotomy) 나눴을 때 '드라이 (dry)' 랩과 '웻 (wet)'으로 나뉘는데 나의 경우 '웻 랩'에서 연구를 배우고 있다. 도대체 뭐가 말라있고, 뭐가 젖어있다는 건지 감이 오지 않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자의 (드라이 연구실) 경우 모든 분석과 시뮬레이션 등 연구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일궈내는 연구실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literally) 물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웻 (wet)' 랩에서는 연구 결과를 얻기 위해 시약을 쓰고 손을 써서 실험을 해야 한다. 즉 우리가 '과학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했을 때 들고 있는 모든 기구들을 사용해서 '실험적' 육체노동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건조하든, 습기가 가득 차 있든 그에 상관없이 모든 연구는 어렵다. 다만 '젖은 실험'은 실험 결과의 재현성 (reproducibility)도 떨어지고 시약 등 관리해야 할 물품들도 훨씬 많으며 나와 같은 생명과학/공학 분야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는 생물이나 세포의 성장 주기에 따라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지는 게 현실이다. 이미 대학원 생활 4년 차를 맞이했지만 실험 노동이 고달픈 날에는 분명 회의감이 드는 날도 있다. "아, 드라이 랩으로 입시할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이런 의구심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너무나도 분명한 이유를 갖고 지금 우리 연구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훌륭한 인품과 '바이올로지'를 연구하면서 이해하게 되는 생명 그리고 인체의 신비에 대한 일말의(?) 궁금증 때문에 우리 연구실을 선택했다. 사실 이렇게 써두면 굉장한 포부와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연구실을 선택한 것 같지만 현실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사람마다 다르고, 연구에 대해 개인이 느끼는 열정이나 목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다면 그 후엔 일종의 '제거 과정 (process of elimination, POE)'를 통해 연구실을 선택하게 된다. 내가 연구실을 선택했던 근거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공유해보자면 나는 애초에 코딩을 필요로 하는 드라이 랩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어려워서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공학 연구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하기 싫은 공부를 배제하는 것이 얼마나 옳은 학습 태도인가? 하고 진지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이상의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될 텐데 나의 성향과 취향에 완전하게 어긋나는 공부는 아무리 남들이 좋다고 해도, 사회가 그 중요성을 완강하게 강조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어떻게든 이겨낼 수야 있겠지만 스스로가 마련한 동기부여와 열정이 아닌 외부적으로 주입된 목표의식에는 분명 큰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구도 즐거워야 잘한다. 즐기는 대학원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지난 3년간 대학원 생활을 해보면서 느낀 점 중 하나이다. (하, 연구 즐기는 거 어떻게 하는 건데.)
그래서 나는 코딩이 필요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구실을 큰 기준점으로 삼아 선택했었다. RNA 생물학을 연구한다면 실험을 열심히 배우고 고등학교 때 재밌게 공부했던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과 메커니즘 (mechanism)을 기반으로 응용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나는 작심삼일의 노력을 몇 번 더 거쳐 다시 코딩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생물학에서 정보 과학 (information science) 그리고 데이터 과학 (data science)을 요구하는 접점이 굉장히 많다. 유명한 분야 중에 "Bioinformatics"라는 생물정보학이 있는데 이는 전산학을 이용하여 방대한 양의 생물학적 정보를 처리하고 전산, 수학, 통계 등 다양한 분야의 방법론과 도구를 사용하여 생명현상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 이를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는 학문이다. 여기서 "생물정보학" 분야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대단하다"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지만 더 이상 학계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아니 최소한 잘 다룰 줄 아는 협업자를 찾아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서는 본인 역시 생물정보학에서 다루는 데이터의 종류와 분석 원리, 그리고 이 분석을 가능케 할 전산학적 언어에 대해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현실은 역시 고달프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경우 약 2010년대 초반부터 새롭게 등장했던 "RNA 시퀀싱"이 문제다, 아니 이를 활발하게 활용하여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RNA 시퀀싱은 인간의 유전자 부분만을 시퀀싱 하는 기술을 가리키는데 DNA에서 전사(transcription)된 RNA를 분석하여 특정 유전자의 발현량을 측정하고 차등 발현 유전자 (differential expression gene, DEG)에 대해 분석 및 해석할 수 있는 기술력이다. 2022년 기준, 요즘 게재되는 생물공학/과학 분야 논문을 살펴보면 시퀀싱 분석을 하지 않은 논문이 오히려 더 찾기 어려운 것 같다. 많이 저렴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시퀀싱 기술은 가장 값 비싼 기술 중 하나인데 이런 분석 기술에 투자를 해야 더 새롭고 흥미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또는 환자로부터 얻은 임상 데이터를 분석하여 해당 연구 결과에서 규명한 내용을 검증할 수 있기도 있고 말이다. 이런 시퀀싱 분석은 실험을 통해 얻은 샘플을 기관에 보내서 기다리는 일뿐만 아니라 한 달 후 받아볼 수 있는 미가공 데이터를 직접 분석하는 단계를 요구한다. 또한 가공된 데이터를 "예쁘게" 즉 독자가 읽었을 때 이해하기 쉽고, 나의 주장에 대해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줄 수 있는 그래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에 어느 정도의(?) 코딩 실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또 한 번 코딩 공부에 도전하게 되었다.
마음을 다잡는 데 있어서 연구실 선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연구적으로 "닮고 선배를 '손민수'하다 보면 (따라 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저런 모습이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런 동기 부여와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혼자 공부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공부 자료나 웹 사이트 리스트를 왕창 받게 되었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내가 지금 '코딩'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생겼고 그래서 나도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굳건해졌다. 무엇보다 최근에 친한 친구랑 대화를 나누며 "박사학위의 쓸모"에 대해 조사해보고 우리만의 학위과정 무사 완료를 위한(?) 동기 (motivation)를 마련하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국내외 할 것 없이 박사 후 위촉 연구원 (post-doc) 포지션에 대해 알아보고 필요한 업무 능력 등 자격 조건에 대해 읽어보니 "생물정보학 분석 능력이 필수는 아니지만 (not mandatory) 강력하게 선호된다 (strongly preferred)"라는 부가설명 구간이 있었다. 윽... 괜한 자격지심에 공격당한 느낌이었다. 당장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피해 가더라도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라면 박사과정 대학원생일 때 미리 배워두는 일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스스로도 당당한 박사가 되어 자신감을 느낄 것 같고,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항상 본인이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고 자괴감을 느껴왔는데 "예쁜 데이터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과 같은 배움의 '투 두 리스트 (To-do list)'를 하나씩 지워 나가다 보면 나의 성장을 되돌아보며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선언한다. 코딩 공부를 해낼 것이다. 또 욕심이 많아져서 미리 받아둔 교육 사이트도 끝이 없고 유명한 코딩 블로거의 공부 노트도 즐겨찾기에 죄다 저장해뒀다. 집에서 간단한 코드 정도는 돌려보며 연습할 수 있는 '백수 PC'도 마련해뒀고 이제 남은 일은 퇴근 후 앉아서 몇 줄이라도 두들겨보는 일이다. 약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하기 싫고, 대학원 생활이 나에게 맞는 길인가 싶은 마음에 GOD의 '길'을 반복 재생하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내 일을 더 잘하고 싶다는 의욕과 함께 코딩 공부에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필요한 블로그 포스트의 내용을 속독하며 오랜만에 노트 정리를 준비하고 있다. 희한하게도 잘하려는 욕심 대신 마음을 비우며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을 살짝 비우자 의욕이 충전되고 있는 느낌이다. 신기한 일이다. 매일 연구실에 출퇴근하며 내가 본인이 잘하고 있다는 확신에 목말라 있었는데 그 기준과 확신을 뒷받침해줄 노력의 근거는 결국 모두 다 스스로부터 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냥 하자"라는 마음이 어떻게 나의 대학원 생활에 의욕을 불어넣어 준 것인지 자세한 메커니즘을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이런 포부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열의가 짧지 않게 지속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설 연휴를 앞두고 실험이 잘 안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 한 주였는데 연휴의 달콤함과 더불어 연구에 대한 열정 역시 제대로 충전되는 휴식 기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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