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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Jun 01. 2022

내가 필요한 건 뉴욕이었어

뉴욕이 내게 가르쳐준 수많은 인생 교훈

'콘크리트 정글'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도시, 바로 뉴욕이다.   없을 만큼 빼곡하게  면적을 채우고 있는 회색  고층건물과  사이를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도심  공원들, 바로 뉴욕 중심부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화려한 모습과 웅장한 스케일에 매혹되고  다른   누군가는 어지럽도록 밀집된 인구와 곳곳에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때문에 뉴욕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되는데 나의 경우는 완연한 전자다 - 나는 뉴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렇다. 뉴욕은 말 그대로 "special place in my heart, " 즉 내 마음속에 특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장소다. 내가 8년째 살고 있는 대전광역시보다도, 놀고먹을 것이 많아 떠나는 길이 항상 아쉬운 서울특별시보다도 그리고 내가 여러 나라에서 내가 여행했던 많지 않은 도시 중에서도 뉴욕은 단연코 1등의 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2018년 뉴욕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그 뭉클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데 같은 기억으로 4년의 시간을 살아내다가 이번 5월 내가 그토록 각별히 여기는 뉴욕 시티에 한 번 더 다녀올 수 있었다.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면 우리를 반겨주는 짐 카트. 4년 전에 무료 대여 가능했는데 이젠 $1를 지불해야한다. Air train 을 타고 도심으로 출발!
도착하자마자 "여기는 뉴욕이에요!"라고 외치는 도심 속 풍경들. 영국에서 처음 맛 봤던 Pret 커피숍의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뉴욕 도심을 걸었다. 나 좀 뉴요커 같았나?
관광객만 다닌다는 뉴욕 미드타운의 타임스퀘어. 관광객만 다녀도 상관없다, 이번엔 나도 관광온건데 뭐. 가장 상징적인 타임스퀘어와 뉴욕의 노란 택시들.
추천받은 케이크집이라 방문해봤으나 너무 커다란 치즈케이크였다. 미국은 음식 양이 과하게 많은데 제일 무서운 건 그 많은 양에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짧디 짧은 자유시간 동안 빠르게 다녀온 락펠러센터의 Top of the Rock 전망대. "I love NY"이 정확한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문구이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컨크리트 정글.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가장 처음 뉴욕에 가본건 2018년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행복하고 여유로운 막 학년을 보내던 무렵 생명화학공학 전공자로서 머쓱한(?) 합격 소식이었지만 클라우드 기반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의 마케팅 인턴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다. 2016년 온 가족이 함께 했던 괌 여행을 제외하면 북미 대륙을 처음 밟아보는 일이었는데 심지어 내가 가장 큰 환상을 갖고 있던 동부 지역이라 그 합격 소식이 더 반가웠다. 스타트업 본사는 뉴저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다른 개발팀이나 데이터 사이언스팀과 다르게 마케팅 부서 팀원의 경우엔 뉴욕 지사로 출퇴근하는 방식이었다. 행복했다... 함께한 마케팅 인턴 동료 중 바쁘고 혼잡한 출퇴근 길에 불만을 터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 역시 그토록 복잡하고 정신없는 뉴욕 출근길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에 벅찬 마음이 들었다.


사실 뉴욕 도심에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미드타운 (Midtown)에 위치하고 있는 펜 스테이션 (Penn Station) 근처에선 사람들이 담배를 태우고 있지만 담배 냄새가 아닌 어딘가 불결하고 쾨쾨한 냄새가 느껴지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대마초 (cannabis) 향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 탑승을 위해 역으로 내려가면 쥐들이 모여 아침 식사하는 모습을 아주 쉽게 볼 수도 있다. 그 친구들은 절대 디즈니 <라따뚜이> 에서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털도 많이 나있고 야생 토끼처럼 덩치도 크고 사람에게 까지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자신들이 뉴욕 지하철의 주인인 것처럼 철로를 활보한다. 소심하게 숨어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당당한 모습에 여행자로서, 관광객으로서 위축되기도 하는데 '찐' 뉴요커가 되려면 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가져야 하나 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냄새뿐만 아니라 덥기도 무지하게 더운 여름날이었다. 사실 2018년 여름은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기록적으로 더운 여름 날씨를 기록했던 한 해인데 기온만 보고 비교했을 때 한국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뉴욕 역시 불쾌할 만큼 뜨겁고 덥고 모든 것이 땀에 절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리의 오물 (filth)과 더위가 혼합되어 새로운 물질이 탄생한 느낌이랄까. 아무리 프레시 하게 숙소를 나서도 펜 스테이션에 내리기도 전에 온 몸이 땀에 절었고 덕분에 인턴 기간 두 달 동안 쉴 새 없이 빨래방에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공짜도 아니었는데, 덕분에(?) 세탁기에 사용되는 쿼터 (quarter) 짜리 동전의 귀함도 알게 되었다.


덥기도 덥고, 더럽기도 더러운, 그리고 물가는 극심하게 높아서 지하철 한 번 타면 3달러에 외식은 쉽게 꿈도 꾸지 못할 뉴욕 시티가 나는 왜 그리도 좋았을까? Long story short,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뉴욕의 활력 (dynamism)이 참 좋았다. 이전 글들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열두 살 때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8년 동안 살았었다. 중국도 스케일 하면 섭섭하지 않게 자랑할 거리가 참 많은 나라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상하이에서의 유년 시절은 나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웅장한 자연 관경도 좋지만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도심 속 모습도 나를 설레게 했고 국제학교에 다니면서 느꼈던 언어 공부와 이를 통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 역시 항상 나를 들뜨게 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대학 공부를 (상하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훨씬) 작고 소중한 대전에서 하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 안에 적지 않은 답답함이 쌓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뉴욕에 도착한 매 순간 나는 정말 행복했다. 꼭대기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솟아 오른 고층 빌딩을 보며 뭉클함을 느꼈고 횡단보도조차 기다리지 않는 바쁜 뉴요커들의 어깨빵(?)이 반갑게 느껴졌다. 서로를 밀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도심 속 모습이라니. 단조롭디 단조롭던 나의 대전 생활과 크나 큰 대비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4년 전 여름 방문했던 Empire State Building의 꼭대기 전망대. 당시 뉴욕의 웅장한 스케일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던 기억까지 있다. 알차게 노을까지 보고 내려왔다
마침 여름이라 독립기념일 폭죽놀이를 하고 있어서 뉴저지에 가서 공연도 관람하고 불꽃놀이도 구경했다.
마케팅 부서 사수님이 사주신 뉴욕 전통 피자. 이탈리아 화덕피자랑은 살짝 결이 다른데 더 짜고 더 느끼하고, 결론적으로 더 맛있다(?!)
주말마다 부지런하게 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oMa 현대 미술관 등 뉴욕에서만 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겼다.
브루클린에 갔을 때 반드시 들려야 한다는 덤보 (DUMBO). 근처에서 친구들과 브런치도 먹었는데 맨해튼보다는 훨씬 더 가성비가 좋고 맛도 좋았다.

물론 고층 빌딩과 어지러운 인구 밀도 외에도 뉴욕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 도시다. 처음 뉴욕에 간 두 달 동안 출퇴근도 열심히 하고 나름(?) 주중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는데 그와 동시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참 많았다. 회사 대표님과 마케팅 부서 사수님은 말 그대로 미국의 '슈퍼 인싸'셨고 덕분에 인턴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분야에서 활동 중인 지인이 있다면 곧바로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처음으로 미국의 '네트워킹'을 피부로 느껴본 순간이었는데 실제로 당시 인연이 닿았던 분들과 4년 뒤인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뉴욕의 '글로벌함'은 밤 잠을 설칠 만큼 나에게 큰 설렘을 안겨주었다. 외국어 실력을 십분 활용하며 회사 동료들과 문제 풀기 (problem solving)에 열을 올렸고 열정 넘치는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니 "무엇 (what)" 보다는 "누구와 (with who)"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생명화학공학을 전공했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실제로 마케팅이나 컨설팅, 또는 그 외 어떤 것이든 내가 진심으로 열정을 느끼는 분야를 찾아 열의에 불타오르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정답처럼 느껴졌다.


내가 뉴욕과 사랑에 빠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점에 있다. 인턴 기간 내내 본사 직원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었고 자신감이 충만해진 나는 평소 학교에서 공과대 수업을 들을 때처럼 기죽지 않고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주말마다 뉴욕 도심 속을 탐험하며 미드타운, 센트럴파크, 하이라인, 그린위치, 소호,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등 동네별로 도장을 깨며 음식과 문화에 스스로를 절이는 경험 역시 정말 매력적이었는데 항상 "우리 오늘 뭐하지?"에 대한 답변이자 선택지로 가득한 뉴욕이 정말 매력 있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여름 동안 일했던 회사의 대표님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해주신 선물 같은 말이 내 마음속에 유독 깊게 자리 잡았다.


You are bright, fun and plesant to work with.

"총명하고, 재밌고 함께 일하기 기분 좋은 사람이다." 의도치 않으셨을 수 있지만 대표님께서 해주신 칭찬은 내게 가장 큰 뭉클함을 선사했고 앞으로도 내가 꾸준히 추구하고 싶은 인간상의 모습을 그리는데 도움을 주셨다. (겁이 많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내 몸 어딘가에 타투를 새긴다면 "bright, fun and plesant"라는 문구를 새기고 싶다.)


역시 뉴욕 이야기를 시작하니 말이 많아지고 글이 길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뉴욕에 대한 내 사랑에 대해 실컷 기술해봐야겠다. 막 학년 여름 방학에 미국에 다녀오고 다니 그만큼 후유증도 심했다. 반드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나의 모습을 돌아보자면 그땐 해외 취업을 알아봐야 할지, 미국 유학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과 의욕만 앞섰고 실제로 계획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는 마냥 서툴렀던 것 같다. 결국(?) 예정대로 자대 대학원에 석사로 입학해서 시간을 사려고 했고 박사 유학을 꿈꿨지만 지금은 계속해서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 2년 차 학생으로 나름 열심히 대학원 생활을 해내고 있다.

4년 전 미국에 갔을 때 주말을 투자해서 보스턴에서 연구 인턴 중인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 때 하버드와 MIT 캠퍼스를 보고 꼭 오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미국병'이 더 심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궁극적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내 현황을 돌아보며 내가 진 기분에 시달렸다. 누구와 경쟁하고 있는지도, 내기를 한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 기분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뉴욕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까. 그곳에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진로나 커리어 선택지, 나를 기꺼이 채용하겠다는 회사나 연구실 책임자 (Principal Investigator, PI)도 없었지만 미국에 가지 못한 내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스스로가 스스로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거나 불만족한다는 것은 정말 큰 불행과 직결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마음 때문에 나는 정말 쓸데없이 불행한 3년은 보냈던 것 같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감사하며 내가 선택한 "국내 대학원에서의 생명공학 연구"에 나의 100%를 투자해볼 수 있었지만 마음이 잡히지 않으니 계속 허공만 바라보며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런 기분이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좀처럼 완치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박사 2년 차 봄날, 학회 참석을 위한 나의 뉴욕행이 결정되었고 역시나 다녀와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필요한 건 뉴욕이었다는 사실을.


이공계 대학원에 4년 차 재학 중인 미래의 연구자로서(?) 굉장히 부끄러운 발언이지만 그동안 과학이 멋지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계속해서 "어쩌다 보니"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나의 경우 정말 "어쩌다 보니" 과학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교적 수학과 과학 내신 관리가 용이했던 국제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학 입시 역시 이공계를 선택할 수 있었고, 동아리 활동과 인턴십 등으로 바쁘게 학부 생활을 마치다 보니 취업 준비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순간 내가 만든 작은 결정들이 이어져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지라 현재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냥 불행했다. 말 그대로 자기 연민에 빠져서 연구의 목적이나 개인적 포부, 꿈과 목표를 세우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뉴욕 학회 경험을 통해 과학 하는 일이 정말 멋지다는 크고 값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게 바로 뉴욕의 힘인가 보다. 

학회장은 롱아일랜드 부근 바닷가 근처에 있어서 산책 15분이면 바닷가에 갈 수 있다. 도착해서도 뷔페식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제공 받아서 편리하고 든든했다.
학회장 내부와 쉴새없이 칼로리 충전이 가능했던 커피 브레이크. 덕분에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연구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중간에 테라스에서 치즈앤와인 파티도 즐기고... 과학하는 사람들도 와인의 맛을 잘 안다구요!?
정말 활발한 디스커션이 오갔던 학회 중 포스터 세션. 세시간 동안 포스터 세션이길래 내 발표 끝내고 구경해야지라고 생각했으나 세시간 반동안 방문자가 끊이지 않아 목이 쉬었다.
귀엽고 '너디한 (nerdy)'한 과학자 전용(?) 스티커. 워낙 다이어리 꾸미기도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스티커만 왕창 사왔다.
마지막 날 만찬 메뉴는 랍스터! 원래 롱아일랜드 지역은 랍스터로 유명하다고 한다. (보스턴이 더 유명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팔뚝만 한 감자와 나무 만한 브로콜리를 곁들인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모여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대한 활발한 질의응답을 통해 더 좋은 피드백과 의견을 주고받고, 무엇보다도 커피 브레이크나 식사 시간 동안 편한 안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연구적으로 협업점을 찾아가는 모든 과정이 굉장히 생산적이고 (productive) 전문적으로 (professional)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는 과학자들의 표정과 발표할 때 느껴지는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열정이 멋지다고 느껴졌고 닮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롤 모델 삼을 수 있는 마땅한 사람들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대학원에 입학하면 모든 게 다 새롭게 느껴지고 적응하기 바쁘다 보니 딱 알맞은 롤모델을 만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게다가 지난 2년 반 동안 팬데믹 때문에 과학자들 간의 교류도 원활하지 못했으니 엎친데 덮친 격이다. 하지만 이번엔 닮고 싶은 롤모델을 수없이 만났고 내가 대학원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 이런 모습일 수 있고 이런 사람들을 내 "동료"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멋지게 느껴졌다. 나도 연구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느낀 첫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은 경험이었다. 다양한 연구책임자 (PI) 그리고 포닥 연구자들과 (Post-doc) 연구 이야기를 하고 소통하며 2-3년 후를 기약했다. 반드시 매력적인 과학자가 되어 포닥 연구를 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사심을 가득 담아 후속 메일을 보냈는데 짧은 시간 안에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아주 기쁜 일이다.


이번 학회 출장에는 자유 시간이 넉넉히 않아 관광은 반나절 정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학회장에 머물다가 곧바로 귀국했는데 조금도 아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제대로 된 꿈과 희망이 채워지는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멋지고 더 열심히 해서 닮고 싶은 커뮤니티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나니 평소의 나 역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하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돌아와서 답장받은 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조언도 있었는데


연구라는 게 대부분의 시간엔 사실 힘들지만 발견의 즐거움과 교류하는 기쁨들이 있어서 보람 있고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지당하신 말씀... 내가 처음 뉴욕에 갔을 때 발견했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두 번째 뉴욕 방문 동안 알게 된 과학자들의 멋짐. 이 두 가지 인생 교훈을 잘 조합해서 앞으로의 대학원 생활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정말 멋진 척척박사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싶다. 내 마음 깊고 소중한 곳에 뉴욕은 언제나 자리 잡아있을 테니, 오늘의 내가 어디에 있든 항상 내 꿈을 향해 노력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뉴욕 길가에서 발견한 문구. 너의 현실이 될 때까지 꿈꾸라는 말이 힘든 시기를 겪고 뉴욕에 재방문한 나에게 뉴욕이 건네는 개인적인 응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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