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클한 파리 일지 첫 번째 이야기, 여행 계획
올 가을, 파리 여행을 결정했다. 단순히 아이디어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항공권과 숙소 예약 모두 마쳤다! 고물가, 고환율, 코로나19 등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수십 가지라는 점을 잘 인지하고 있지만 타협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여행을 강행하게 될 이유가 분명 해지는 시기가 과연 올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유독 바쁜 여름을 보내서인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끓었다. 올봄에 투고했던 논문에 대한 일부 수정 (minor revision) 작업을 해내느라 휴가는커녕 가족 여행에도 합류하지 못했고 쳇바퀴 같은 7-8월을 보내고 나니 평소와 달리 여행 결심과 항공권 결제가 굉장히 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역시 돈 쓰는 게 제일 쉽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보상심리를 기반으로 한 "금융 치료"용 여행은 아니다. 파리는 내가 항상 여행하고 싶었던 도시 중 한 곳이다. 아직 파리에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나에게 파리는 이미 사랑에 빠지기 위해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는 와인과 치즈의 조합을 사랑하고, 갓 구운 빵과 샌드위치에도 진심이며 역사 탐방과 문화생활을 위한 박물관 또는 미술관 방문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특색 있는 디저트 메뉴와 향 좋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 "카페" 공간을 소비하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한다. 영화 또는 소설 속에서 접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파리의 모습은 이미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뭉클한 도시였다. (이런 나의 기대감이 여행 기간 동안 증폭되어 굳혀질지 또는 와장창 무너질지는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으로선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상황이다.)
파리에 직접 가보기도 전에 이토록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면... 그동안 왜 직접 가보지 못했는지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여행을 강행해야 할 명분을 마련하거나 적절한 시기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게다가 여행을 좋아하는 만큼 "내 돈 내산" 해외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특히 서유럽 국가를 제대로 여행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예를 들어 학부생 때부터 해외 인턴십이나 계절학기 교환학생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왔지만 유독 서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에 다녀올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살면서 유럽에 딱 두 번 가봤는데 첫 번째는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입시 면접 때문에 홀로 다녀온 영국 여행이었고 두 번째는 앞서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독일 베를린으로 다녀온 계절학기 이수 경험이다. 베를린 계절학기와 함께 마지막으로 여행했던 체코 프라하와 오스트리아 빈 여행 역시 2016년 2월의 일이니 벌써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대학원 입학 후 비교적 금전적(?) 그리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나니 코로나19가 등장하고 말았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이동 그 자체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고 해외에서는 아시아계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도 기승이었다. 실제로 비행기 여행에 제한 조건과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쉽게 여행을 결정하는데 넘어야 할 산이 유독 험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우선 올봄 미국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오고 나니 해외여행에 대한 공포감이나 부담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주변 사례를 보면 실제로 해외여행을 계획하여 출국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해외로 떠나는 모습을 들키기 조심스러워했다면 올봄부터는 다시 열린 비행길에 몸을 싣고 떠나는 소식이 들려왔다. 항공사나 여행사에서도 보다 더 공격적으로 프로모션 상품을 광고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나 역시 보이지 않는 마케팅에 넘어간 것인가!?) 비행길은 열리는데 본인은 여름휴가도 다녀오지 못했고, 논문 원고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지치기도 해서 (지도교수님 역시 "여름에 논문 작업을 잘 마치고 가을에 쉬다 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악착같이 교수님 말씀을 잘 듣는 대학원생이 될 수밖에(?)) 나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십 대 내내, 특히 후반에 접어들면서 강력하게 깨닫게 된 스스로와 나누는 대화의 중요성과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기반으로 결제하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말이다.
이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파리 여행의 동행자는 바로 언니다. 아는 언니, 선배 언니, 엄마 친구네 딸 언니(?) 말고 우리 친언니와 함께 떠난다! 사실 비슷한 가을 시기에 벨기에 학회 일정이 잡힌 친한 대학원생 친구의 일정을 고려하여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도 했지만 겹치는 기간이 유독 짧아 아쉽게 느껴져서 다른 동행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언니를 아주 열심히 꼬셨다. 프랑스어는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행길에 혼자 프랑스 여행을 해내기엔 부담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장 믿을 수 있고, 온갖 재미가 보장된 데다가 라이프스타일까지 동기화되어 따로 맞출 부분이 없을 언니랑 같이 파리에 꼭 가보고 싶었다. (물론 순탄한 여행을 위해 서로 배려하고 물보다 진한 피가 섞였지만 동생인 내가 더 노력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번 파리 여행 기간은 무려 8박 10일인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여행 기간이다. 이전에 언니와 함께 했던 여행 경험을 생각해보니 단 둘이 떠난 국내 여행은 아직 한 번도 없고 대학생 시절 언니와 함께 3박 4일로 도쿄 여행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것도 벌써 5년 전 일이군.) 나는 갓 대학교 2학년을 마친, 유독 예민하고 자신만만했던 이십 대 초반이었어서(?) 여행 일정 동안 언니와 다툼이 굉장히 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나름 철들었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물론 대화로 풀어나갈 성숙함은 갖고 있으니 (사실 이렇게 적으면서도 자신은 없다.) 나름 평탄한 여행 일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막연한 망상일 수 있지만 파리 여행 중 아무리 마음이 조이거나 화가 나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플랫화이트 한 잔에 갓 구운 바게트 빵과 잠봉 햄, 브리치즈를 올려 만든 샌드위치를 센 강 앞에서 먹고 디저트로 '삐에르 에르메'에서 장미맛 마카롱을 사 먹으면 모든 긴장감이 녹아내릴 것 같다. 무튼 내가 더 잘해야지.
처음엔 8일 동안 파리에만 머물 것인지, 근교 여행을 강행할 것인지 또는 이웃나라 스위스나 벨기에 독일 또는 영국 여행도 함께 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으나... 우리의 결론은 파리 또 파리였다. 둘 다 예쁜 옷과 카페, 맛있는 '구르메 (gourmet)' 음식과 문화생활을 좋아해서 그런지 파리에서만 머무는 8일 역시 굉장히 짧게 느껴질 것 같았다. 간단하게 여행 블로그 포스트나 책자를 찾아봐도 이미 갈 곳이 넘쳤다. 언니와 나 모두 구글맵에 따로 폴더를 만들어서 가고 싶은 곳을 저장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여행 책자를 몇 권 살펴보지도 않았는데 저장된 곳이 백 군데가 넘어가고 있다. 맛보고 싶은 음식을 맛보고, 구경하고 싶은 곳을 실컷 구경하고, 사고 싶은 물건을 실컷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대한 만큼 실망감도 크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려오지만 여행은 원래 출발 전 계획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며 뭉클한 파리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비행기표를 구매한 주말에는 친구와 저녁 약속 전 시내에 있는 교보문고에 방문하여 여행책을 구경했다. 2016년 베를린으로 계절학기 교환 프로그램을 떠나기 전에 친구에게 베를린 여행책자를 선물 받은 경험이 있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섬세함이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여행 관련 블로그 포스팅이나 유튜브 여행 브이로그 등 참고할 콘텐츠가 정말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장을 넘기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삼키는 일을 굉장히 좋아한다. 인터넷에서는 뭐든지 다 중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고,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마셔봐야 할 것 같은데 편집되어 출판된 여행책자 또는 에세이집에서는 저자가 정리하고 엄선한 흔적이 보여서 더 믿을만한 정보가 많다고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베를린 여행 책자를 받은 이후로는 굵직한 여행을 앞둘 때면 항상 서점으로 향해 여행책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책을 골라서 구매하는데 파리는 유독 유명한 여행지라 그런지 선택지가 참 많았다. 여행 사진집이나 에세이집도 다양하게 있고 테마별 코스별로 여행코스를 정리한 책자형 출판물도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박영희 작가의 <비-하인드 파리>를 선택했고 나머지 책자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며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참고하기로 했다. 디테일하게 적혀있는 관광지 또는 맛집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참고하고 나중에 직접 방문해서 나만의 평을 내려보는 일도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다. 참 재밌는 일이다.
마침 어제 논문 최종본을 저널 측에 제출하고 나니 밤바람에 가을이 묻어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번 여름 내내 내가 전문적으로 잘하고자 하는 일을 열심히 해냈다는 뿌듯함과 (아직 최종 수락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노력해본 경험이 나에게는 큰 성취로 다가왔다. 여행이나 휴가는 없었지만 나라는 대학원생에게 짙은 흔적을 남긴 2022년 여름을 기억하기 위해 가을 여행을 결심했고 운 좋게 언니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 상상 속 파리의 뭉클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도시와 무한히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남은 기간 동안 간절히 바라며 여행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