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처돌이'가 가을을 사랑하는 다섯 가지 이유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이보다 더 예쁘게 가을 아침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이 구절은 바로 1991년 발매된 가수 양희은 선생님의 <가을 아침>의 가사 일부이다. 가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아름답고 무해한 가사가 유독 돋보이는 이 곡은 내가 가을이 찾아오면 반드시 찾게 되는 곡 중 하나이다. 역시 나는 타고난 가을 쟁이다.
화려하지 않더라도 어여쁜 가삿말과 기타 연주의 매력이 잘 드러나는 <가을 아침>은 아이유의 리메이크 버전 때문에 어린 세대에게도 굉장히 유명한 곡이 되었다. 나 역시 5년 전 가을 발매되었던 아이유의 <가을 아침>을 듣고 뭉클한 가사와 그의 청량한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실제로 <가을 아침>은 아이유의 두 번째 리메이크 앨범의 선공개 곡이자 첫 번째 트랙 수록곡인데 그는 앨범 발매 4일 전 가을 아침 7시에 <가을 아침>을 기습적으로 깜짝 선공개했다. '성적과는 무관하게, 팬들에게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할 수 있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의도라고 했는데 정말 통해버렸다. 아직도 아침 수업을 위해 기숙사를 나서며 따끈따끈하게 공개된 아이유의 <가을 아침>을 들으며 가을 아침 공기를 있는 힘껏 들이마신 기억이 생생하다. 과장을 보탤 필요가 없이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고 덕분에 그 가을 아침을 진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내가 사랑하는 가을에 대한 짙은 기억이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나는 진심으로 가을을 사랑한다. 뜬금없는 고백 같지만 그만큼 진심이다. 가을은 다른 계절과 다르게 차분하고 우아하다.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봄 꽃이 만개했을 때의 화려함이나 폭염과 폭우에도 불구하고 뜨겁고 열정적인 여름의 모습, 또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을 때 겨울이 주는 포근함과도 결이 완연히 다르다. (물론 이 모든 건 사계절이 뚜렷한 경우에만 해당되지만 말이다. 사실 한국도 기후 위기로 인해 사계절의 뚜렷함을 점점 잃고 있는 것 같아 속상하지만 이건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하자.) 내가 느끼는 가을은 넘치는 열정으로 인해 목소리만 큰 사람이 아니라 잔잔하게 스스로의 매력을 뽐내며 우아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절과도 같다.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르던 여름의 햇볕이 뜬구름 가득한 파란 하늘로 변신하고, 매미 소리는 기분 좋은 바람 소리와 잠자리의 자태로 대체된다. 초록색으로 뒤덮인 나무들은 슬슬 노랗게 또는 빨갛게 옷을 갈아입고 훌륭한 일 년을 보냈음에 감사하며 더 나은 내년을 기약할 수 있는 겨울맞이를 준비한다. 점점 짧아지는 가을이 마냥 아쉽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만큼 더욱 온 힘을 다해 만끽해야겠다는 다짐을 되새기게 된다. 가을을 통해 주어진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까지 배워갈 수 있는 것이다.
유독 가을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음식이다. 먼저 제철음식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바로 무화과이다.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무화과 철은 '그릭 요구르트 러버'인 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되어준다. 무화과는 생으로 먹거나 말려서 먹거나 잼 또는 통조림의 형태로도 먹을 수 있는데 나의 경우 무조건 생으로 먹는다. 다소 물컹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나뉘는 경우도 보았지만 나의 경우 '극호'다. 게다가 무화과의 달콤한은 치즈의 고소한 풍미와도 어울리기 때문에 리코타 치즈나 부라타 치즈를 곁들여 올리브유와 후추를 뿌려먹어도 고급진 샐러드 메뉴가 되어준다. (앞서 언급한 그릭 요구르트와의 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제철음식 말고도 가을 날씨 덕분에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메뉴가 있다. 바로 따뜻한 라테이다. 사실 어떤 음료든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계절이라 좋다. 선천적으로(?) 위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차가운 음식이나 매운 음식을 피해야 하는 체질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몸을 데워줄 수 있는 메뉴를 좋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구황작물의 고소함이 일품인 단호박 라테나 우유 거품 위에 시나몬 가루를 잔뜩 뿌린 카푸치노 같은 음료 말이다. 날씨를 만끽하며 여유를 즐기기엔 여름은 너무 덥다. 특히나 이번 여름은 폭우와 폭염의 변덕 속에 괴롭게 버텼던 여름인지라 더욱 여유를 갖고 좋아하는 음료 한 잔을 즐기기에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나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처서가 지나고 나니 곧바로 따뜻한 음료를 주문하고 싶은 날씨가 찾아왔다. 물론 아직까지는 늦여름의 기운이 남아있지만 살짝 설렜어 나.
가을에 태어났다는 점 역시 내가 가을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다. 스스로를 '가을 아기 (autumn baby)'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음력 9월, 양력 11월에 태어나서인지 코끝에 가을바람이 살짝이라도 닿으면 금방 뭉클해지곤 한다. 너무 좋아서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을 만끽하는 와중에 생일 파티까지 할 수 있으니 이런 게 바로 금상첨화 아닐까(?). 게다가 공교롭게도 친한 친구들 중 11월 생일자가 열 손가락을 넘길 정도로 많은데 이건 정말 신기한 거 같다. 덕분에 같이 모여서 공통 생일 파티를 열곤 하는데 크리스마스 느낌으로 다 같이 모여 선물 증정식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을 뚜렷한 명분이 생겨서 더 좋다. (슬슬 생일 선물 쇼핑으로 바쁜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을 날씨의 기분 좋은 시원함과 쾌적한 바람 덕분에 옷을 챙겨 입는 재미도 훨씬 더 깊어진다. 솔직히 여름이나 겨울은 옷 입는 재미가 없다. 여름엔 무조건 시원하고 땀 차지 않는 반바지에 반팔티가 최고다. 신발도 예쁜 단화나 좋아하는 스니커즈를 신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덥다, 무조건 '쪼리'가 최고다. 겨울엔 또 너무 춥다. 기모는 무조건이고 껴입을 수 있는 내복과 두툼한 롱 패딩이 최고다. 한 겹 한 겹 껴입다 보니 옷 태도 안 나고 핏도 내 맘에 들지 않는다. 일부러 멋 내고 싶은 마음에 한 겨울에 짧은 코트를 입고 한남동에 놀러 간 날에는... 땅을 치고 후회했었다. 여러분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봄에는 좀 더 옷 입는 재미가 분명하지만 꽃샘추위라는 얄미운 강적 때문에 옷을 선택하는 게 참 어렵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색감은 차분한 웜톤 계열이기 때문에 (쨍한 노란색을 좋아하지만 옷 입을 때는 브라운, 카키색, 남색 등을 좋아한다.) 봄보다는 가을에 더 어울리는 색깔이 많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목폴라를 실컷 입을 수 있는 계절 역시 가을이다. 확실히 가을에는 옷 입고 사는 재미가 명확하다. 어쩐지 요즘 지름신이 너무 자주 찾아온다. 멀어지고 싶은 '그분'이다.
마지막 이유는 유독 가을에 대한 향수가 짙다는 점이다. 나는 8년 전 가을 처음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우라 여름에 (5-6월) 졸업식을 마치고 7월에 귀국했는데 같은 해 가을학기 입학이 가능했던 유일한 학교를 선택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했었다. 스무 살 가을에 대한 뭉클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절대로 맞다) 가을학기 개강 시즌만 되면 유독 마음이 저리고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증폭된다. 이렇게 과거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매번 스스로를 타이르지만 8년째 소용이 없다. 그 시절, 성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떼며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들과 함께 소속감을 느꼈다. 그렇게 추억이 하나하나 쌓였고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나'라는 자아가 되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지금은 과거를 추억한다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다. 그만큼 소중한 시간을 보냈음에 감사하며 뭉클함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이젠 각자의 자리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친구들이지만 언제나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마음을 남기고 싶다. 8년 전 가을에 시작된 나의 모든 인연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내 기준) 여름의 마지막 날이다. 8월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9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된다. 물론 올해의 4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달은 아니지만 외투를 걸쳐 입고 따뜻한 머플러를 챙겨서 외출할 생각 해 설레기도 하고, 벌써부터(?) 연말을 계획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다시 가을병이 시작되었군. 그래도 연구적 성취감과 10월 파리 여행 등 다양한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이번 가을은 실컷 사랑하며 뭉클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