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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Dec 24. 2022

일기장과 대화하는 소중한 연말

일기를 통해 하루, 한 달 그리고 한 해 곱씹어가기

벌써 연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야속하게 정말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봄을 지나 바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다가옴에 따라 센치함을 느끼는 날이 잦아졌었는데 정신없는 4분기를 보내다 보니 벌써 2022년의 마지막 주를 맞이하고 있네요. 글을 읽는 일이든 쓰는 일이든 꼭 시간을 내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지난 3개월 동안에는 숨 가쁘게 달려온 탓에 차분히 앉아 따뜻한 라테 한 잔을 들이키며 글을 적어낼 여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변명을 요구받은 것은 아니고 한 달에 브런치 글 서너 편은 꼭 게재하고 싶었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린 탓에 이는 제 자신에게 써 내려가는 변명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바쁘게 지낸 덕분에 올 한 해는 감사한 일도 참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연구에는 “성과”라는 크고 작은 열매가 맺혔고, 제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많았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 덕분에 몸도 많이 튼튼해졌고 정신적으로도 좀 더 온화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에 사용되는 에너지도 줄어들었고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해지는 한 해를 보낸 것 같습니다.


한 해의 수고함을 인지하고 그 시간들을 되짚어 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은 바로 연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한 해를 곱씹는 시간은 가족, 연인 또는 친구들과 함께 해도 좋을 테지만 저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 대화하는데 가장 좋은 도구이자 수단은 바로 일기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빨간색 다이어리는 올해 2022년 내내 함께한 애착 다이어리. 왼쪽은 새해를 함께할 새로운 다이어리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이어리에 대한 환상과 집착이 강한 아이였습니다. 아주 어릴 때, 그럴싸한 일기를 써 내려가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일 때는 문방구에 진열된 알록달록한 공책을 구경하는 일만으로도 참 즐거웠습니다. 화려한 겉표지뿐만 아니라 속지는 또 얼마나 예뻤는지, 그 예쁨을 잃고 싶지 않아서 손글씨를 연습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예쁜 속지를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거죠.


그다음은 여행 다이어리입니다. 중국에서 살던 시절, 중학생 때 미술 상장과 함께 받은 오리엔탈 감성의 공책이었는데 공책이 너무 예쁜 탓에 문득 공부용으로 사용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지도 두툼하고 품격 있는 자태를 자랑하던 공책에 감히 수학공식을 적거나 단어 암기를 위해 형광펜을 그어가며 공책을 채워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날이 있을 때 - 학창 시절 특별한 날이라고 하면 여행 일정이 있을 때 - 공책을 들고 다니며 ‘여행 일기장 (travel journal)’이라는 기능적 명명법을 사용하여 일기를 쓴 날짜와 공간, 그리고 제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여행 일기장의 문화적 풍부함을 위해 엽서를 사서 끼워 넣거나 흔한 노천카페에서 챙긴 명함이나 영수증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제 여행 일기장은 두꺼워져 갔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은 속지를 채울 수 없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더욱 정이 들었고 더 다양한 내용의 콘텐츠를 위해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실제로 여행 일기장에는 옥스퍼드 방문 당시 경험부터 베를린 한 달 살기 경험, 고등학교 단짝 친구를 만나기 위해 홍콩에 두 번 방문한 기록과 뉴욕, 그리고 시카고를 여행하는 동안 적어나간 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양미 가득한 자태의 공책.
여행 다이어리 속에서 발견된 세계 각국 도시들의 기념품 엽서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방문했을 때 챙겨나온 명함을 보관하기도합니다.

여행 다이어리를 통해 기록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록하고 그 기록이 제 자신의 역사가 되어 먼 미래에 과거의 제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창구가 생긴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대학생이 되기 전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다이어리를 채워나간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학창 시절 교우관계나 학업, 그 외 다양한 활동은 건너뛰고 일기만 쓴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기나긴 일기를 매일 써 내려간 건 아닙니다. 저는 주간 또는 월간 속지로 묶여 있는 다이어리를 사용했는데 그날 있었던 일, 유독 맛있었던 급식, 친구와 나눠 먹은 디저트, 그리고 가족과 함께 방문한 쇼핑센터 등에 대해 간단히 기록했습니다. 시험 기간에는 스트레스나 시험 성적에 대해 적은 날도 있었고 하루하루의 짧은 요약 다음엔 제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 적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나중에 읽었을 때 더 재밌는 글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보다는 제가 느낀 감정에 대한 글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다이어리 속지는 바로 주간 (weekly) 다이어리입니다. 너무 많은 공간을 채우지 않아도 되고 딱 적당한 양의 속마음을 담아낼 수 있죠.

앞서 언급한 대로 매일 쓰던 다이어리를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계속했습니다. 스무 살 청춘에게 매일 하루의 끝에 그날을 정리하고 곱씹는 일은 다소 버겁게 느껴졌나 봅니다. 제출해야 할 과제도 있고, 참석해야 할 동아리 미팅, 세미나, 그리고 술자리가 많았던 대학생 시절 저는 그렇게 대학생 시절 동안에는 다이어리에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물론 여행 다이어리는 예외입니다. 해외 파견 인턴십이나 단기 교환학생, 또는 스스로 계획한 해외여행 동안에는 꼭 여행 다이어리를 지참하여 소중한 기록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여행 다이어리 또는 SNS 포스팅으로 대체될 뻔한 저의 감정 가득한 글쓰기는 제가 대학원생이 되었던 2019년에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진로고민은 멈추지 않는데 할 일과 배울 일은 쌓여만가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대도 충족시키고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는 보람찬 대학원 생활을 기대했던 저에게 대학원 저 연차 시절은 혼란으로 가득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 글을 써서 브런치 작가로 거듭난 해도 2019년입니다. 진심이 담기면 글의 질도 향상되나 봅니다.) SNS에 너무 찡찡댈 수는 없으니 좀 더 개인적인 글을 위해 일기장을 선택했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제 감정과 고민들을 기록했습니다.

대학원생이 되고부터 유독 더 열심히 써온 다이어리들.
다이어리 꾸미기 아이템들도 심심치 않게 사모으고 있습니다. 돼지띠라 사본 돼지 스티커와 학교 행사 때 나눔 받은 마스킹 테이프.
장시간 비행해야할 때도 반드시 챙기는 책 한 권과 일기장. 불을 밝혀야해서 옆좌석에 앉아 계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하지만,,, 최대한 식사 시간을 이용하긴 합니다.
파리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카페에서 일기를 쓰다가 일기장으로 쓸 노트 한 권을 더 구매해버렸습니다.
일기를 쓰다보면 입이 심심해지거나 간식 생각이 나서 군고구마와 함께 한 다이어리 타임.
건강을 위한 기록용 다이어리인데 요즘엔 어플이 워낙 잘 되어있어서,, 직접 구매하진 않았지만 속지가 귀여웠던 다이어리.

1년, 2년 그리고 3년이 지나 저는 박사과정 2년 차 연도를 마무리하는 대학원생이 되었고 최근에는 제가 이전에 우울한 마음으로 써 내려갔던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고민 가득한 과거의 제 자신과 마주하여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지만,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노력의 열매를 맛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그 시간을 보다 더 지혜롭게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성실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며, 제게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있는 일상의 규칙을 따르는 일 밖에는 없었는데 말이죠. 당장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답답함과 인스턴트와 같이 빠르고 쉽게 느낄 수 있는 보람에 목말라 있던 저는 “대학원”이라는 진로를 선택한 스스로를 원망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화살표가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향하는 안타까운 일 마저 발생하고 말았죠.


변화를 도모한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하고 또 당연한 삶의 이치. 물론 실천이 어려운 법이지만 올해의 다른 점이 있다면 행동에 옮겼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무기력해지는 몸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고, 이른 퇴근에만 얽매여 있는 스스로를 원망하는 대신 오전에 논문을 읽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연구,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지도교수님과 선후배에게 더 적극적으로 소통했고, 크고 작은 성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열심히 모색하였습니다. 다행히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짐에 따라 미국 뉴욕에서 처음으로 해외 학회에 참석하였고, 국내에서도 대면으로 학회가 진행됨에 따라 구두 발표의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논문 게재 승인 소식도 올여름이었고 덕분에 여름휴가를 하루도 떠나지 못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유럽 여행을 계획하여 언니와 함께 파리로 일주일 간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는 “내가 나임”을 느낄 수 있는, 나의 대체 불가한 강점이자 장점 덕분에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았고 학회 주니어 과학자 대표, 파견 연구 계획 및 장학금 신청에도 계속해서 도전했습니다. 호흡이 긴 대학원 생활인 만큼 그 속에서 본인이 만족을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성취를 찾는 일 역시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은 한 해였습니다. 더 이상 선생님이 짜준 시간표를 따라가는 학생이 아니기 때문이죠.

다이어리에 진심인 친구들끼리 주말 아침에 모여 스콘과 쿠키, 그리고 커피를 주문해놓고 일기 쓰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물론 수다에 잠식당하는 시간이긴 하지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언제 보람을 느끼고, 누구와 시간을 보낼 때 웃음이 끊기지 않고, 어떤 음식을 얼만큼 먹었을 때 기분이 편안한지에 대해 잘 아는 데는 일기장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디브리프 (debrief),’ 즉 방금 수행한 임무에 대해 보고를 듣는다는 뜻인데 방금까지 살아낸 하루를 곱씹으며 스스로에 대한 보고를 - 일과, 감정 등 다양한 보고가 될 수 있습니다 - 적어봄으로써 나중에 회고할 수도 있고 스스로를 더욱 잘 돌 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도 있겠죠. 내년에도 그 노력과 시간투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우선 개인적인 감정과 회고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주간 (weekly) 속지가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에 닿은 저는 심플하고 효율적인 다이어리를 한 권 구매했습니다. 그 외에는 스타벅스 e프리퀀시 적립을 통해 선물 받게 된 일간 (daily) 다이어리인데 이는 예쁜 속지가 아깝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연구 노트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시간 계획과 다양한 디스커션 내용을 담고, 실험을 위해 필요한 계산을 적어 내려가기엔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어떤 일기장에 계획할지에 대해 적는 제 자신이 극단적인 계획형 인간처럼 느껴지지만 이런 기질 역시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예뻐해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연말의 하루입니다.

언니 덕분에 프리퀀시 적립금으로 받은 다이어리. 새해에는 한 권은 개인용, 다른 한 권은 연구노트 용으로 사용해볼 계획입니다.
2022년을 보내주고 2023을 맞이하면서 참고하기 좋은, 무엇보다 낮과 밤을 나눠서 다짐을 적어내려가기 좋은 속지라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이어리를 쓰고 계신가요? 이미 쓰고 계신다면 작년 또는 재작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올해 초,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스스로 어떤 변화를 맞이했고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또는 아직 쓰고 계신 일기장이 없다면 내년부터는 일기장을 마련하여 하루씩 간단하게라도 기록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일기 쓰기”라는 다소 식상한 새해 다짐이 될 수도 있고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좋습니다. 새해에는 일기를 통해 나 자신과 대화하고, 하루, 한 달, 한 해씩 곱씹으며 스스로의 일상과 역사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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