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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Dec 28. 2022

파리로 떠난 대학원생 뭉클쟁이

첫 논문 게재 기념을 위한 8박 10일 파리 여행기

무더운 2022년 여름의 어느 날, 드디어 투고한 논문이 리비전에 통과하여 억셉을 고려해주겠다는 메일을 받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계획해둔 여름휴가 계획은 완전히 물 건너간 셈이 되었지만 말이죠.


우선 맥락에 대해 간단하게 덧붙이자면 학계에서는 영혼을 담아 열심히 연구한 내용을 글로 적고 (논문 작성) 연구내용의 범위 (scope)와 그 내용의 참신함과 창의력을 고려한 영향력지수 (Impact Factor)를 고려하여 알맞은 과학회논문지, 즉 저널 (Journal)을 찾아 논문을 투고 (submit)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연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겠죠. 이제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과 거절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한 달 정도 회신을 기다렸으나 저널의 에디터가 인정하지 않을 경우 바로 ‘리젝트 (reject),’ 즉 거절의 메일이 도착합니다. 절대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거절 메일이지만 첫사랑에게 고백하고 차인 느낌과도(?) 비슷할 것입니다. 논문의 제1저자로서 오랜 시간 공들여서 고민하고, 실험하고, 분석하고, 작성한 논문인데 과학계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기도 전에 까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진심을 담아 애틋해진 내 논문에게 ‘매력 발산’의 기회는 주어지지도 않은 채 저널 에디터가 논문을 거절하는 경우 마음이 쓰라린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바로 ‘리비전 (revision)’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동안은 논문 완성도 향상 또는 내용 범위의 불일치를 이유로 거절당하던 제 논문이 같은 분야 과학자 동료에게 닿아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게 된 것입니다. 대단한 성과, 무엇보다 흥미로운 데이터에 대한 칭찬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조금만 더 손을 보면 더욱 완성도 높은 논문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이자 ‘약속’과도 같은 회신이었습니다. 이런 마이너 리비전의 의미란 “동료 과학자(리뷰어)가 제안한 추가 실험이나 분석, 또는 글 수정을 잘 수행하고 나면 우리 저널에 당신의 논문을 게재해 주겠다”는 암묵적 약속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시간은 한 달. 7월 말에 도착한 ‘마이너 리비전’ 메일에는 ‘8월 말’이라는 ‘데드라인 (deadline)’이 명시되어있었고 주어진 시간 안에 논문 완성도를 향상하기 위해 저는 예정된 가족여행과 그 외 하계 바캉스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문 투고 후 두 달 만에 받은 연락. 마이너 리비전이 주어졌고 기간은 한 달이 주어졌다.

그렇게 운명을 받아들이며 일말의 억울함도 없이 여름방학 동안 논문 리비전에 몰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온 결과가 좋은 저널에 실릴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릴 수 없었고, 무엇보다 정말 오래 기다려온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연초부터 투고를 준비하여 ‘저널 도장 깨기’ 단계를 시작했으니, 거의 1년 반 만에 ‘논문 억셉’과 실제로 가까워졌음을 느낀 것입니다. 실험을 위한 시약을 주문하고 어리고 건강한 세포를 다시 준비하고, 데이터를 정리하며 논문 원고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저널 측과 소통하거나 지도교수님께 수정본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드릴 땐 작은 실수 하나의 존재감이 유독 부각되어 전문가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긴장과 노력의 굴레에서 한 달을 보낸 저는 무사히 리비전을 마칠 수 있었고 감사히도 열흘 만에 ‘최종 억셉’이라는 출간 결정 소식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기억은 정말 짜릿한 것 같습니다. 많은 선배님들께서 ‘첫 논문’의 센세이션 (sensation)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직접 느껴보니 분명 더 즐겁고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문헌 조사 및 정리를 시작하고 필요한 추가 실험을 수행했다. 당충전은 직접 구운 비건 스콘으로 했다.

기쁜 소식을 접하고 첫 논문 게재를 마치고 나니 슬슬 ‘인간’ 뭉클쟁이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상심리가 발동된 것이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 이 글을 읽고 계신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은 카피라이트를 기억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광고문안 중 가장 설득력 있고 당장 일상의 쳇바퀴를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글귀이죠. 그래서 떠나고 싶어 졌습니다, 프랑스 파리로 말이죠.


왜 하필 파리? (Why Paris?)라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파리니까 (Because it’s Paris)”라는 답변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본 적도 없는 곳인데 말이죠. 스스로 실증적인 근거 없이 숭배하고 환상을 갖고 있는 파리에 대한 경험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싶었습니다. 예쁜 것, 맛있는 것, 고유한 것, 무엇보다 곳곳에 이야기가 가득한 문화적인 요소가 가득한 파리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고, 보상심리에 대한 욕구가 커질수록 가보고 싶은 도시 순위 중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파리에 대한 욕구가 솟구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여름 내내 연구실에서 바쁘게 지낸 탓에 여유를 잃다 보니 파리지앵의 라이프 스타일이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무튼 이 정도면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파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파리여행이 결정 된 후 교내 도서관에서 빌려온 수 많은 여행 책자.
논문 리비전을 마친 날엔 일퇴 후 동네 카페에서 여행책자와 구글맵을 살펴보며 가보고 싶은 곳들을 기록했다.

굉장히 운이 좋게도 이번 여행은 언니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리비전을 마친 후 파리 여행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저는 가장 든든하고 잘 맞는 동행자인 언니에게 손을 뻗었고 당시 막중한 업무량과 오랜 코로나19 시기로 인해 바람 쐬기가 필요했던 언니 역시 흔쾌히(?) 제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덕분에 내민 손이 무안하지 않았어서 다행입니다. 여행 내내 든든한 동행자가 있어 더 안전하고 재미있게 여행할 수도 있었고 말이죠.) 언니의 동의를 얻은 후엔 속전속결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화상회의를 통해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블로그, 유튜브 등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섭렵했고 각자 동네 또는 교내 도서관에 찾아가 문헌조사를 수행하며 파리에 대한 사전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그렇게 10월 7일 금요일, 출국 날이 다가왔고 우리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8박 10일의 시간 동안 매일 삼 만보를 걸으며 힘든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침이나 지겨움은커녕,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아쉽다는 마음만을 갖고 인천공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파리 여행에 함께 가자고 언니를 설득하며 얻어 마신 연남동 테일러 커피.
그래도 이렇게 행복했으니까 된거다. 다시 가고 싶은 가을의 파리.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온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지금, 아직까지도 언니와 저는 파리 여행의 추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받을 수 있는 운 좋은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리는 실제로 개안의 도시였으며, 여유로우면서도 부지런한 파리지앵의 라이프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디서든 잠깐씩 벤치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고, 또한 길가의 그 어떤 블랑제리 또는 파티세리에 들어가도 맛 좋은 크루아상이나 바게트 샌드위치, 또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친절하고 깨끗했던 파리에서 K-POP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시간도 있었으며 “문화의 도시”라는 명칭에 알맞은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하며 빈센트 반 고흐, 그리고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 진심이 되었습니다.

여행 시작 전과 (왼) 후 (오). 사실 여행 기간 동안 매일 일기처럼 브런치에 글을 게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구경할게 너무 많고 소화할 여행지와 음식들이 너무 많았다.
귀국 전 마레지구에서 들린 포스터샵에서 파리 지도가 그려져있는 포스터를 데려왔다. 이젠 지도를 살펴보다보면 어느 동네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제가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관찰했던 다양한 모습들과 감상평, 그리고 파리의 찬란했던 기억을 곱씹을 수 있는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훗날 다시 파리에 방문하게 될 때 처음 파리에서의 시간을 기억하며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대학원 생활 그 자체의 하이라이트는 아니지만, 첫 논문 기념을 위해 언니와 함께 떠났던 파리 여행을 기억하고자 더 열심히 그리고 자세히 기록해 봐야겠습니다.

감각적인 파리의 포스터샵. 수집할 수 있을만큼 자주 가고 싶은건 욕심이겠지만 꼭 채우고 싶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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