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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급한뭉클쟁이 Dec 24. 2020

연말의 현장감을 잃었다는 슬픔

서로의 체온에 의존할 수 없는 겨울을 마주하며

크리스마스이브다. 다음 주면  해를 마무리하는 새해 이브 (New Year's Eve)  텐데 이만큼 감흥이 없던 적도 없는  같다.


필자는 최근까지 졸업 준비로 인해 다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학위 심사 발표를 준비하고 청구 논문을 작성하며 그 외 논문 투고 준비 때문에도 비교적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일상 속 반드시 해야 하는, 소위 말해 '상자를 체크하는 (Tick the box)' 듯한 내 할 일의 과제들이 아니더라도 올해는 '연말의 따뜻함'이라는 다소 역설적이지만 뭉클한 분위기를 즐기기엔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모두가 정답을 알고 있듯이, 이는 바로 '코로나 19' 때문이다.

그동안 벼르다가 제대로 글을 쓰진 못했지만 필자는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를 정말 좋아한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이 막상 당일에는 -  12 25 크리스마스나 1 1일을 맞이하기 전에는 -   없이 보낸 적이 훨씬 많지만 말이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데도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와 각종 거리의 장식들을 보며 마음 한편이 따뜻해져 오는  아이러니 (irony)  좋아한다.


'연말정산'이라는 말도 참 뭉클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국세청 '홈텍스' 정부 사이트에 접속해서 "13월 월급"은 어느 정도 일지 (또는 때에 따라 얼마를 더 지불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체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산'이라는 단어는 결국 '균형 (balance)'를 뜻하고 한 해 동안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지, 또 새롭게 배운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는 어떻게 더 잘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담는 것 같다. 마음속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끄적이며 자신과 지켜온 약속을 돌아보고 내년에 지키고 싶은 약속과 다짐을 하나하나 세워 나간다는 건 정말 뭉클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연말정산'  해내려면  스스로와의 마주함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그동안 각자 일상에 적응하고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약속을 연말을 '핑계'삼아 반드시 날짜와 시간 그리고 약속 장소를 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모두가 "이렇게라도 얼굴 봐야지"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수도 있고, 막상 약속 시간 전까지는 준비하고 이동하느라 급작스럽게  귀찮음이 몰려올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평소라면 주문하지 않았을 비싼 메뉴와 와인을 곁들이며, 따뜻하게 들려오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정겨운지 모른다. 직장에서의 (professional) 송년회란 귀찮은 의식과도 같을  있지만 내가 고른  사람들과의 송년회는 즐거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얼굴이라도 봐야 근황 토크도 하고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나 역시 회고적으로 지난 1년을 돌아볼 수 있을 텐데. 슬프게도 올해는 다 틀렸다.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조건이 생겨버렸다. 결국 가족들과 조용히, 안전하고 무사히 이번 연말 시즌을 보내보자는 것이 이번 조치의 목적일 텐데 정말 슬픈 일이라고 느껴졌다. 나만 불편한 일도 아니고 모두가 동참하며 이번만큼은 참아야 하는 시기인 것을 머리로도 알고 가슴으로도 알지만 이 모든 사태가 정말 애석하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보고 싶던 친구들과의 모임도 어렵고 오래간만에 서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외출하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아니 눈치뿐만 아니라 이제는 실제로 두려움을 느낀다. 갈수록 집단 감염뿐만 아니라 모두의 일상 속을 파고드는 바이러스의 위험성과 이런 바이러스를 앓고 난 후의 증상에 대해 전해 들을 때면 정말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병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폭신한 티라미수를 나눠먹으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할 수 있는 연말 송년회가 그립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있는 힘껏 슬퍼할 수는 있는 거니까, 글을 통해서라도 찡찡거리려고 한다. 모든 대면 활동이 전면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있는, 머물  있는 공간도 적어지며 가까운 지인들과의 만남에도 제한이 생기다 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까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올해를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이런 사소하고 뭉클한 행복 조차 사치가 되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는 은근 한계가 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 진심을 알아차리게 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줄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가스활명수'만큼  방에 시원함을 느끼긴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  고민이 정리되고 해결되어 간다는 위로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이 정말 아쉽고 속상한  같다.


무엇보다 대면 활동이 최소화되면서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서 현장감을 잃었다는 것이 가장 슬프다. 개인적인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해보자면 필자는 졸업 논문  학위 심사 발표 역시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했다. '내성적 관종' 필자는 제대로  공연은 못해봤지만 "발표하는 순간에라도  무대를 장악해보자" 마음으로 대면 발표를 즐기고 좋아하는데 학위 심사 역시 2D 화면  교수님들께 인사드리며 활발한 '티키타카' 없이 마무리 지어야 해서 안타까웠다. 서로 대면해서 상호작용 하면서 느껴지는 개인의 '아우라' 에너지가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석사 졸업을 하면서 제대로  회식 자리  축하 자리 역시 마련하지 못했다. 연구실 회식은커녕 동기 친구들과 맥주  잔이나 와인바에  수도 없었다. 그래도 지난 2 동안의 노력이 열매를 맺는 소중한 순간인데 "유종이 " 축하하는 맛있는 음식은커녕, 곧바로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맥주  캔을 열며 넷플릭스에서 보던 영화를 재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도 답답해서 모임 인원수에 맞추어 저녁식사를 하러 가도 여덟  반이 되면 자리를 정리해달라는 사장님의 부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데 모두가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지만 아쉽다는 생각을 떨쳐낼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동기 친구들과 함께라면 늦게까지 버틸  (?)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고생한 본인을 위해 연말에는 제주도로 여행을 계획했었다. 해외여행은 이미  건너간  오래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겨울 바다를 보며 낭만적인 숙소에서 책을 읽고 조식을 챙겨 먹으며 음악을 듣고 글을 쓰다 오려고 했다. 하지만 입도 필수 절차로서 코로나 진단 검사가 추가됐다는 소식과 전국 적으로 확산될 모임 금지 관련 뉴스를 듣다 보니 취소 수수료가  불어나기 전에 미리 예약해둔 항공권과 숙소를 취소하지 않을  없었다.


사실 연말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현장감'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MBTI 검사를 해보면 거의 반반의 양향 성격자 (ambivert)이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내향적인 (Introvert) 성향에  가깝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혼자의 시간을 매우 중요시하는 성향이지만 그래도 이토록 만남이 어려워지는 것은 정말 힘들게 느껴진다. 만나야만 공유되는 아이디어가 있고, 서로 마주해야 흘러갈  있는 에너지가 있다. 기술을 통해 우리의 불편함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리모트 (remote)' 어쩌고의 시대가 열린다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오지만 결국 우리들은 만나고 서로 부딪히며 열심히 상호작용하며 살아가야  것이다. 이런 대면 성을 필요로 하는 성질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성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학위 논문 발표든, 요가 수련이든, 보고 싶은 친구와의 따뜻한 밥 한 끼든 - 현장감이 중요하다. 우리가 지금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과 서로의 에너지가 같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특정한 순간이 모든 만남을 뭉클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말은 본가에서 주문해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으며 칼로리 소비 없이 섭취만 이어질 계획이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모두의 건강을 위해 현장감을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때인 것은 분명하다. 모두가 느끼는 답답함과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빨리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대면의 뭉클함을 느껴보지 못한 어린이들과 우리 사회의 미래 세대에게 느껴야 하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해 '현장감'을 존속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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