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실험, 그리고 요리

실험도 요리만큼 재밌다면 얼마나 좋을까

by 성급한뭉클쟁이

자취방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딱히 큰일이 없던 하루였는데도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쩜 이리도 반가운지. 기숙사에 살 때는 그저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잠들기가 일수였는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 장 보러 갈 수 있는 경차와 쓰임새에 맡게 장만해둔 요리 도구, 그리고 언제나 조리가 가능한 인덕션과 부엌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도 장 보는 일을 참 좋아했었다. 어렸을 때 내 기억이 닿는 순간부터 엄마 아빠를 따라 대형마트나 시장에 가는 일은 정말 좋아했다. 형형색색 진열대에 자리 잡고 있는 각종 물건들과 오감을 자극하는 시식코너 음식들, 그리고 먹고 싶던 반찬을 얘기할 때마다 속전속결로 필요한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아내는 엄마의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좋은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항상 제일 싱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야채와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주셨는데 그 모습이 첫 자취를 시작한 나의 모습에 닿은 것 같다.


1월 초부터 자취를 시작했으니 자취 생활 만 두 달 중가장 큰 변화라고 하면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해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취사가 불가했던 기숙사에서 6년 반이라는 시간을 견뎌내면서 참아왔던 요리 본능이(?) 꿈틀대다가 결국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각종 재료를 사서 손질해다가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싶은 메뉴를 만들어보고 직접 먹고, 반찬으로 만들어뒀다가 두고두고 챙겨 먹고, 가끔씩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나눠먹는 재미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이전 브런치 글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나는 챙겨 먹는 음식의 신선도와 영양소 균형, 즉 “탄 단지” 밸런스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물론 엄청난 빵과 떡순이에 화덕피자에 꿀을 푹 찍어 먹는 것을 그 어떤 음식보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단백질과 섬유질 등을 잘 챙겨 먹으려 노력한다. 기숙사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최선이 닭 가슴살에 섬유질 함량이 높다고 하는 비건 빵 정도였으니...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부엌이 생겼고 원할 때마다 편하게 장을 볼 수 있는 자가용까지 생겼으니! 한동안 요리 영상을 보고 저렴하게 판매되는 식재료를 활용할 수 있는 요리에 도전해보면서 정말 재밌는 자취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음식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구운 계란 카레와 크림떡볶이다! 두 메뉴 다 백종원 선생님의 유튜브 채널을 보고 도전해본 음식인데 친구들과 나눠먹어서 그런지 맛도 좋고 반응도 좋았다. (한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나는 백종원 선생님을 정말! 좋아한다. 본인 일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연구, 그리고 나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고자 하는 그 마음가짐과 노력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한다.) 구운 계란은 버터를 넣어 양파를 미리 볶으니 고소한 맛이 더 강해서 정말 맛있었고, 크림 떡볶이는 어려운 재료 없이 집에 있는 재료로 맛있게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들이 어떻게 집에서 만들었는데 이렇게 꾸덕할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비법은 백 파더가 알려준 비결 덕분이었다 - 우유와 더불어 집에 있는 체다 치즈를 두 장 대신 세 장 넣었다! 직접 만들어 먹으니 재미도 있고 맛이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아 더 건강하게 많이, 그리고 잘 챙겨 먹을 수 있는 것 같아 좋은 것 같다.

친구랑 퇴근 후 맥주 한 캔씩과 함께 나눠먹은 구운 계란 카레 (왼쪽) 그리고 스팸과 체다 치즈를 세 장이나 넣어 꾸덕하니 맛있었던 크림떡볶이!

한 가지 살짝 뽐내고 싶은 점은 자취하는 대학원생 치고 반찬과 국을 골고루 만들어서 챙겨 먹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파머스 마켓이다 동네 슈퍼에 가면 반찬코너가 있고 그 앞을 지날 때면 굉장히 솔깃하기도 하다. 내가 몇 번 나눠먹을 만큼만 따로 소분해서 다양한 반찬을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꼭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판매 중이다 - 아몬드가 들어간 멸치볶음, 깻가루가 영롱한 검은콩자반, 그리고 판매원이 직접 부치고 계신 녹두전까지. 몇 번 나눠먹을 양에 혼자 먹을 것을 고려하면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니지만 나는 직접 만들어 먹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조물딱 조물딱 이것저것 만들어 볼 수 있는 재미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달까. 그래서 나는 매번 같은 가격으로 식재료를 산다. 콩나물을 사서 무침을 만들어 먹고, 연육 비율이 가장 높은 어묵을 사다가 조림을 해 먹었다. 가지가 두 개에 2000원에 나왔길래 냉큼 사다가 굴소스를 넣고 반찬을 만들었고 당근이 세일하는 날엔 당근 라페를 만들어 그릭 요구르트와 당근 라페를 올린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더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낭만적이야 정말. 이렇게 하나하나 플레이팅하고 무얼 먹을지 고민해서 식단과 장보기 계획을 짜는 나를 보면 내가 봐도 참 별나다.

소금과 올리브유, 그리고 새콤한 맛을 위해 레몬즙을 듬뿍넣어 마든 당근라페. 식감도 좋고 크림치즈나 그릭요거트와 조합이 정말 훌륭했다.
연구실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퇴근할 때면 꼭 손을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맥주 캔을 따는 대신 다음날 먹을 반찬을 만들어 놓곤 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이 좋아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맛있는 집밥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는데 이런 성장 배경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옛날부터 잘 챙겨 먹은 덕분에 나는 빵식이 아닌 밥 식을 먹을 때면 꼭 국을 먹고 싶어 한다. 따뜻한 국물과 함께 밥을 먹어야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난달까. 그래서 된장국에 도전하여 여러 번 끓여먹고 있는데 최근에는 봄 제철 나물인 봄동을 사다가 된장국을 끓여 먹었는데 정말 향이 좋았다. 앞으로는 미역국이나 황탯국, 콩나물국과 같이 국의 ‘스펙트럼 (spectrum)’을 늘려가고 싶은데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나만의 도전과제인 것 같다.

봄동과 팽이버섯을 넣고 푹 끓여낸 된장국과 돼지고기 뒷다리살로 제육볶음을 만들어 한 상 차려먹었다. 깔끔하고 든든한 맛이었다.

집에 오면 이렇게 즐거운 일이 많으니... 어찌 공부를 더 하고 연구에 대한 고민을 더 하고, 논문을 더 읽을 수 있을까. 스트레스받으면 반찬을 만든다고 했지만 사실 집에 오면 할 일은 더 많다. 요가 수련이랑 홈트레이닝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읽고 싶던 책도 읽어야 하고 구독 중인 주간지를 읽으며 영어 공부도 해야 하며 밀린 넷플릭스도 보고 평소에 글을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고민하여 이렇게 브런치에 업로드도 해야 한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내고 있으니, 이렇게 즐거운 자취 생활을 하면서 나는 더욱 완전한 집순이가 되어가고 있고 혼자 놀기의 진수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은사님께서 자취+졸업 선물로 발뮤다 토스터기를 선물 주셨는데 오븐 기능 덕분에 간단한(?) 베이킹까지 도전하게 됐다. 이건 완성품이 좀 더 쌓였을 때 글로 써보려고 한다.)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계발 외에도 좀 더 좋은 연구를 잘 해낼 수 있도록 역량을 기를 수 있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싶은데, 항상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아니 연구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정말 나의 열정이 부족한 걸까. 읽어야 할 논문은 많지만 일 적 (professional)인 일에는 합리화가 너무 쉽다. 본인을 탓하고 싶진 않은데 내 삶을 풍성하게 가득 채울 많은 것들이 하고 싶어서, 집에 오면 절대 논문에 손이 안 가는데, 보다 더 슬기로운 대학원 생활을 해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내 일에도 좀 더 시간을 쓸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래도 몸이 훨씬 건강해진 것 같다. 잘 챙겨 먹고 잘 쉬고 나니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체중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루하루 내가 건강하게 챙겨 먹고 많이 움직이는 쪽을 선택한다. 하지만 더 나은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조급함과 초조함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일 역시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걱정만 하기보다는 직접 노력하여 변화를 일궈내는 모습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연구실에서 하는 실험도 요리만큼 재밌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시에 여러 가지 시약을 다루고 시간 공격 (타임 어택)에 민감한 실험을 오랜 시간 해내 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짧은 시간 안에 요리에 익숙해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젠 상호작용의 화살표를 돌려 집에서 채워가는 에너지가 나의 공적 영역에도 닿기를. 불필요한 자극과 스크린 타임에서 멀어지고 내 일과 내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 볼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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