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집들이 생활

코로나 시대, 외식 약속 대신 집에서 즐기는 집밥 만찬

by 성급한뭉클쟁이

이틀 후면 자취 만 삼 개월 차가 된다. 과장 열 스푼 더해서 이미 자취한 지 삼 년 정도는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잘 적응하며 재미있게 이것저것 하다 보니 집에 중독된 것 같다. 집순이 포텐셜도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고 웬만한 약속이나 큰일이 아니면 나는 “집에 가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집에 가서 할게 얼마나 많은데... 반찬도 만들고, 베이킹도 하고, 빨래랑 청소도 해야 하고 유튜브 틀어놓고 요가도 해야 한다고.


얼른 집에 가서 포근한 나만의 공간에 앉아 쉬어가는 시간이 정말 중요해졌지만 자취의 특전 (perks) 이자 큰 재미 중 하나는 바로 집들이다. 친한 친구들을 내 공간에 초대하는 일이 참 즐거운 요즘이다. 설레는 마음에 친구들을 초대해놓고 막상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우리 집에 들어서면 괜히 조금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나로 가득 찬 나의 공간에 주변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은 우리의 친밀감을 확인시켜주고 서로의 휴식과 안녕을 진심으로 바래 주는 사이가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까진 아주 ‘찐친’만 초대해서 그런 건가?)


사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다는 건 꽤나 큰 의미를 갖는 일이다. 개인마다 부여하는 의미에 차이가 있겠지만 ‘집’이라 함은 온전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personal sphere) 나만 알고 싶었던 나의 모습들이 엿보일 수도 있는 이벤트다. 예를 들어 내가 쓰는 향수나 바디로션, 침대 위 이불 색깔이나 무늬, 냉장고 속 식재료나 나만의 청소 방식 등 나에겐 너무 당연한 집안 속 표준들이 누군가에겐 낯설고 처음 보는, 즉 신기한 관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기숙사 생활을 오래 했던지라 룸메이트 친구와 방을 나눠 쓰고, 잠깐씩 같은 기숙사 친구들끼리 본가에서 보내주신 과일을 나눠먹는 일이 아니면 서로의 개인적 공간에 초대받거나 초대할 일이 생기지 않았었다. 학교 기숙사 규정상 남녀가 따로 쓰는 기숙사이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나이 상관없이, 학교 외부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내 친구들이면 내가 원할 때, 서로 시간이 맞을 때, 기분이 좋을 때 초대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 공간에 초대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인지, 내 주변 친구들에게 나를 조금 더 공개하는 시간이 마련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 집에 곧잘 놀러 다녔지만 반대로 친구들을 초대한 적은 많지 않다. 꼭 다 같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친구네 집이 있었고 한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 이동거리가 꽤 됐기 때문에 내가 큰 마음먹고 친구 집을 방문하는 경우가 더 잦았다. 요즘은 어렸을 때 다 못한 집들이를 하는 건지 평소에도 꽤 자주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중이다. 꼭 거창한 “집들이”가 아니더라도 퇴근하면서 친한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와 평소에 먹는 것처럼 밥을 지어주곤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너무 재밌고 신난다! 뭉클한 자취 일기에서도 다루었듯이 반찬을 만들고 요리를 하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 친구들이 놀러 온 김에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보고 양 조절 실패 걱정 없이 맛있는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어서 재밌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자주 밖에서 외식을 하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코로나 덕분에(?)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나름의 요리 실력을 (라고 쓰지만 사실 플레이팅 실력이 다 했다) 뽐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사실 정말 맛있는 음식이 아니면 외식을 안 좋아한다. 기숙사 생활을 길게 하면서 매번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도 지쳤고 맵고 짜고 달아서 입안이 얼얼해지는, 다 먹고 나면 기분 나쁘게 배부른 외식 메뉴보다는 집에서 내가 자주 해 먹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이 더 기분 좋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라이스와 당근라페를 곁들인 타르틴 베이커리의 컨트리브레드
직접 만든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 저녁. 물론 가끔씩 시켜먹기도 한다, 치킨은 항상 옳다.
덜 매운 버전의 홈메이드 떡볶이! 떡맥 조합이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식후땡’으로 따뜻한 차랑 미리 깎아둔 과일과 전날 구비해둔 구움 과자를 나눠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신난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니 대화도 더 잘 이어지는 느낌이고 디저트가 있다면 진지한 대화든, 가벼운 수다든, 오랜만의 캐치업 (catch-up)이든 상관없다. 물론 상황과 사람에 따라 맥주 한 잔, 또는 와인 한 잔을 곁들이기도 한다. 금요일이나 주말이라면 더욱 편안하니 좋겠지만 아니면 또 어떤가. 집에서 기분 좋게 마시는 맥주 한 캔은 퇴근 후 피로를 싹 가시게 해 준다.


친구들이 집으로 자주 놀러 오게 되면서 생긴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우리 집에 친구들의 흔적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나는 운이 좋게 센스 넘치는, 특히나 선물 센스가 넘치는 친구들이 참 많은데 대부분의 경우 빈손 대신 소중한 마음과 선물을 함께 들고 찾아와 줬다. 집들이 선물이 많아지면서 나의 공간에 내 사람들의 발자취가 하나씩 더해지는 느낌이다. 선물에도 그 사람의 고민과 개성이 묻어나는데 친구들이 얼마나 나를 생각해주고 골랐을지, 그리고 평소에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아이템이 나에게 도착하는 것 같아 더 좋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항상 ‘방 술’을 함께했던 전 룸메이트 친구는 나에게 와인잔을 선물했고 (짠 했을 때 유리가 부딪히는 소리의 청량감까지 듣고 골라준 선물이다) 티 타임을 (tea time)을 좋아하는 개발자 친구는 귀여운 아보카도가 그려진 머그잔을 선물했다. (내가 아보카도 샌드위치 같은 브런치 메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카카오 계열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내가 조르디를 좋아한다는 점을 기억하고 쿠션 인형을 선물했고 (덕분에 심심하던 침대 위에 귀엽고 폭신한 친구가 생겼다!) 힙한 ‘얼리 어댑터’ 친구는 구하기 어렵다는 크로우 캐년의 머그잔과 접시, 그리고 세상 귀여운 빵 달력을 선물했다. 요리에 재미 들린 빵순이로서 너무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심심해 보이던 하얀 벽이 채워져서 따뜻함이 더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좋아하는 커튼 향으로 선물 받은 캔들 워머
빵순이 취향저격인 빵 달력과 은사님께서 선물 주신 발뮤다 토스터기다. 디자인도 너무 예뻐서 거의 인테리어 소품이다.

그 외에도 내 먹성(?) 취향을 기억하고 소중한 선물을 전해주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디저트 중에 구움 과자류를 가장 좋아하는데 (폭신한 스펀지케이크나 타르트나 아이스크림 등 말고 마들렌, 휘낭시에, 까눌레를 정말 좋아한다. 양도 적당하고 깊은 버터맛도 좋아하고, 따뜻하고 진하게 내려진 홍차나 아이스 아메리카도와 함께 곁들여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구움 과자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뤄볼 계획이다.) 무려 까눌레 4종 세트를 선물 받은 날도 있다! 말차, 코코넛, 초코, 레몬 맛이었는데 맙소사... 쫀득한 까눌레를 사이에 두고 나눈 수다는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나는 레드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훨씬 더 좋아하는데 집들이 날 화이트 와인을 선물 받아 함께 마신 날도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선물 받은 와인 잔과 스파클링 와인, 딸기 그리고 생크림의 미친 조합. 네 가지 맛별로 선물 받은 까눌레는 비주얼 부터 영롱했다.

선물의 스케일과 더불어 나에게 ‘베이킹’이라는 새로운 취미거리이자 도전을 안겨준 선물도 있는데 바로 발뮤나 토스터기다. 은사님께서 석사 졸업과 자취 기념(?) 선물을 주셨는데 역시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명성에 맞게 모든 빵이든 맛있게 구워 먹고 간단한 베이킹 요리도 도전해보고 있는 중이다. 베이킹 역시 ‘작품’이 좀 더 쌓이면 글로 한 번 더 다뤄봐야겠다.


친한 친구 중 한 집순이 하는 친구에게 “나도 집순이 다 되었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공감 대신 “진정한 집순이는 외부인을 집으로 초청하지 않는다”라고 말해 나를 머쓱하게 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MBTI를 직접 테스트해보면 나는 항상 중간 지점에서 왔다 갔다 하는 Introvert (내향적) 성향이 나온다. 즉 양향 성격자 (ambivert)라는 의미일 텐데 자취를 시작하고도 이런 나의 성향이 반영되는 것 같다. 분명 온전히 혼자 충전해가는 시간도 너무나 소중하지만, 내 공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도 참 좋다. 함께 밥을 해 먹든 차를 마시든, 1:1도 좋고, 친구들 서너 명이 모여 오순도순 있는 시간도 나에겐 큰 기쁨이다 뭉클한 순간이다. 플러스 알파로 마음씨 예쁜 선물까지 받으며 서로의 마음도 확인하고 내가 받았을 때 기뻤던 아이템을 바탕으로 나 역시 집들이 선물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는 중이다. 요즘 내 나이 때가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자취를 시작하는 친구들이 참 많은데 나도 내가 받았을 때 기뻤던 만큼 큰 뭉클함을 전달할 수 있는 선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번 달에도 날씨만큼 따뜻한 만남의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마스크 없는 봄의 기회는 또 한 번 물 건너간 것 같으니 본진에서 집중하고 집에서 친구들과 소소하게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자주 마련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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