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을 위한 내 공간 마련하기

대학원 공부에 전념하기 위한 방법론적(?) 자취

by 성급한뭉클쟁이

사춘기가 언제 가장 심했느냐 하면 바로 작년이다. 2020년은 난데없이 창궐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지구촌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지만 나에겐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에 더욱 힘든 한 해였다. 지금은 괜찮아졌으니 결국 다 잘 풀린 것이 아니냐고? 내가 그토록 깊게 끙끙대며 앓아낸 고민들은 단숨에 간단명료하게 정리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완벽한 해결책이야 있겠냐만 약간 찜찜하게 남아있는 고민의 잔해들은 내가 앞으로도 안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결국엔 진로 고민이었다. 내 삶을 무엇을 위해 써야 할지, 쓸 수 있을지, 곧바로 답을 얻고 싶었다. 세상이 궁금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을 것 같은데, 솟아오르려 꿈틀 되는 나의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가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조금의 에너지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름 진지하게 그 고민을 해내다 아무런 답에도 도달할 수 없으니 마음이 많이 조급해졌었다. 연구실에서도 방에서도 집중할 수 없었고 집중하지 못하는 본인의 모습에 화까지 났다. 어쩌라는 거지 정말. 모든 순간을 반쪽 짜리 마음으로, 100% 를 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봐도 미운 모습까지 사랑하기는 힘든 법이다. 집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싫었고 붕 떠 있는 듯한 기간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반쪽 짜리 마음으로 그려내려는 미래는 예쁘고 순탄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밑그림은커녕 삐뚤빼뚤 무엇을 그릴지 몰라서 지우개 질을 반복하는 아이 같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소심하게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도화지만 찢겨나갔다. 이미 속해 있는 단체에서든 새롭게 도전해보려는 분야에서든 나의 반쪽 짜리 마음은 들키기 십상이었고 오랜 시간 머문 학교와 도시를 떠나고 말겠다는 포부가 머쓱할 만큼 결과는 매번 좋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치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고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그치며 과거의 선택들과 본인의 역사마저 부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나의 반쪽 짜리 마음은 너무 뻔히 티가 났을 것 같다. 숨기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았고 다소 뻔뻔할 정도의 태도로 새로운 도전에 임했다. 많은 선택지를 손에 쥐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은 위험요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그리고 선택의 자유도 (Degree of Freedom)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지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예의일 뿐만 아니라 필수사항이었고 특히나 수천 명의 면접자들과 대화를 나눠본 면접관들 눈에는 더더욱 뻔히 티가 났을 것이다 - 아, 이 친구는 마음속에서 간을 보고 있구나!


깊고 마음 아프게 고민한 시간들이 무색하게 나의 고민은 도돌이표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땅히 지금보다 더 매력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선택에 대한 근거를 대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핑계도 만들어두었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았고, 코로나 19 때문에 온 세상이 불안정해졌으며 나 역시 또 다른 길을 그토록 원하지 않았다고. 내가 지금까지 일궈둔 나름의 성과를 매몰차게 뒤로 하고 새로운 도전을 향해 떠나보기엔 나 역시 당장의 연구와 환경에 큰 애착을 느끼던 중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 모두 속일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속일 수 없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은 두려웠고 내가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얼마큼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으며 이토록 큰 미지수에 비해 내가 지금 속해 있는 곳은 너무나 안락하고 안전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 역시 과거의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이었다. 타인에 의해 결정된 것 같아 억울해도 결국엔 나의 선택들이 모여 지금을 (present)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집중”하고 싶었다. 2021년에 꼭 이루고 싶은 목표는 “몰입” 그 자체였다.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선택하지 않은 길에 (The Road Not Taken) 대해 끊임없이 호기심을 느끼는 대신 오늘을 살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노력할 수 있는 곳에서 열심히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도 나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말이다.)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는 대신, “삶”이라는 여행의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보살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인생엔 중요한 기준이 참 많다. 그리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안정감, 성취와 도전, 성장과 포부, 익숙함 또는 새로움 등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안정감도 원했고 새로움도 원했다. 상극에 있는 두 가치를 갈망하며 선택하지 못하고 모순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석사 과정 동안 집중하기 어려운 진로 고민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토록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했던 나의 모습이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고민 덕분에 “몰입”이라는 키워드가 2021년 내 삶 속에 자리 잡았고 덕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즉 나만의 자취방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내가 걷기로 결정한 연구의 길은 확실한 장기전이다.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연구를 하면서도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컨디션 조절과 자기 관리를 해내는 것 역시 실력의 일부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만 바라보면 결국 또 아무 일도 해낼 수 없게 되고 내가 원했던 “몰입하는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하고, 미래 걱정에 두 손을 놓고 있는 대신 논문을 손에 쥐고 실험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보고, 내가 공부한 한 논문에서 파생될 수 있는 연구 질문들을 (Research questions) 열심히 본인에게, 그리고 주변 동료들과 교수님께 던져보며 토론하고 싶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말고 “파이데이”를 축하하는 도시에 살고있다. 이젠 익숙하고 심지어 자부심을 느끼는 지경.

삶의 의미보단 삶 그 자체를 의미 삼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나는 의미 부여 또한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걸 알았다면 열심히! 의미를 만들어가면 된다. 역사 없는 개인은 없기에, 지난 나의 서사를 돌아보며 스토리를 만들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연구의 중요성과 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다. (사실 연구도 결국 다 스토리텔링인 듯하다. 논리적으로 내가 풀고자 한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방법과 결과를 설명하고 이런 질문이 왜 그토록 중요하고 주목받아야 하는지 홍보하는 길고 긴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엔 내가 하는 연구를 간단하게라도 소개하는 글을 써봐야겠다.) 앞으로도 집에서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며, 연구도 열심히 하고 논문도 많이 읽고 책도 열심히 읽고 친구들도 자주 초대해서 밥도 사이좋게 나눠먹는 슬기로운 대학원생이 되어야지.

대학원생, 논문에서 탈출하는 그날까지. 도비는 자유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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