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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형 (F) 공대생이 더 많이 필요해

결과보다는 과정, 무엇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by 성급한뭉클쟁이

요즘 MBTI가 한창 유행이다. 이는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고유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유형을 열여섯 가지 타입으로 분류한 검사이다. MBTI는 네 가지 카테고리에서 두 가지 경우수를 두어 4의 2승, 총 열여섯 가지의 성격 유형으로 사람들을 분류하는데 첫 번째 카테고리는 에너지의 방향 (외향형/내향형), 두 번째는 인식의 기능 (감각형/직관형), 세 번째는 판단과 결정 기능 (사고형/감정형), 마지막으로 네 번째 카테고리는 생활의 이해 양식 (판단형/인식형)으로 나뉜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인식의 기능에서의 “감각형”과 세 번째 카테고리에서의 “감정형”을 구분하기가 좀 어려워 간단히 조사를 해봤는데 전자는 감각 (sensing)과 직관 (intuition)의 차이를 가리키는 기준이다. 감각적인 경우 “비유적, 또는 추상적인 묘사보다는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는 것을 선호하며 꼼꼼하고 디테일에 강한 현실주의자, 그리고 원칙주의자에 가깝다”라고 한다. 그리고 후자 “감정형”의 경우 “사실보다는 사람과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의미와 영향을 중시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유형으로서 “좋다, 나쁘다와 같이 감정적으로 판단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고 서로에 대한 조화에 집중한다고 한다.” 감각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은 결국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지, 그 경향성을 나타내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다. (필자의 경우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SF”이기 때문에 결국 거기서 거기일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속한 단체에는 사고형 (Thinking) 사람들이 정말 많다. 공학도가 가득한 학교에서 공부 중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꼭 전공 분야가 그 사람의 판단 성향을 절대적으로 결정짓는 것 같지는 않다 - 왜냐면 나는 과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완전한 감정형 (Feeling) 이기 때문. 하지만 논리와 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공학과 과학 분야에서는 진실과 사실에 초점을 두어 실험을 하고 시뮬레이션을 (simulation) 돌리며 원리와 원칙을 중시하여 결과에 중점을 두는 사람이 꽤 많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정형인 내가 이 분야에 적응하기가 많이 어려웠고 말이다 - 사실 아직도 적응 중이고 사소한 부분에서도 굉장히 도전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엔 (솔직히 아직도 조금은) 모든 문제가 “맞다”와 “틀리다”로 구분되는 과학 분야가 싫었다. 모호함을 최소화해야 객관적 판단이 가능하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이론과 공식을 적용해서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오직 확실함을 기반으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과정에서의 노력은 어떤 기준을 바탕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만약 어떠한 결과가 유의미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결과를 도출해내기 까지의 모든 여정은 곧바로 무용지물, 쓸모없는 시간 낭비로 치부되는 것인가?

나는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참 소중한데 이런 마음을 십분 이해해주는 친구가 다수는 아니었다. T집단에서 F친구들끼리 똘똘 뭉쳐 가능했던 나의 학교 생활 :)

모두에게 통용되는 답이 아닐지라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나는 결과도 (outcome) 중요하지만 과정도 (journey)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 하루라도 의미 없고 상관없는 하루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결과로만 소통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내가 아무리 마음 쓰고 노력을 했어도 결과로 보여줄 수 있는 자격증이나 시험 결과, 또는 수료증이 없다면 내 노력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 제 아무리 성실하고 의미 있는 하루하루를 살아왔어도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결과로 보여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이력서는 여백이 가득할 것이다. 고유한 개인의 일생을 종이 한 장으로 정리하여 무미건조한 문장들로 한 사람의 역사를 요약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요약본을 바탕으로 또 한 번 “합격,” “불합격”이라는 성적표를 또 한 번 받게 되는데 이는 마치 우리 사회가 결과로만 소통하는 악의 굴레에 빠져버린 것만 같다.


학부생 시절 전공 수업을 들을 때도 이런 딜레마는 항상 겪었던 것 같다. 본인이 공부는 꽤나(?)한다고 자부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주변에 똑똑한 친구들은 너무 많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예복습을 철저히 했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열심히 공부했다. 시험 기간에 몰아서 공부하지 않고 평소에도 성실했으며 학부 4.5년 내내 모든 수업에 출석했다. 특히 교수님과 케미가 좋은 경우 강의 내용을 더욱 경청했고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기록했다가 오피스 아워에 (office hour) 교수님을 찾아뵈어 질문을 드렸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높은 성적”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기간에 벼락치기하는 친구들을 “이길 수” 없었고 게다가 한 학기 동안의 성적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성적 만으로, 즉 시험 두 번의 평가 비율을 50%씩 하여 성적을 받는 경우엔 나의 최종 점수가 더더욱 낮아졌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오히려 공평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주변 친구들은 출석 비율과 수업 참여도 점수가 낮으면 낮을수록 그 수업을 더 선호했고 나중엔 출석 점수 10%를 포기하고 시험만 잘 보자 주의로 변신한(?) 친구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성적이 중요해도 교수님과의 학문적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방식이 틀린 걸까 라는 내적 딜레마가 심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친구들도 시험 기간에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을 것이다. 총량으로 계산해보면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깊게 공부했을 수도 있고, 각자 공부 스타일이 있는 것이니 이 역시 “옳고 그름”으로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 얼마큼 노력했는가에 대한 의미를 더 중시한 나로선 전공과목에서 상위 성적을 차지할 수 없었고 학부 과정 내내 스스로의 전공에 대한 의구심을 품고 공부했던 것 같다. (아오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프다.) 그래서 나도 숨통이 트이는 수업이 필요했는지 토론 수업을 많이 들었고 인문사회과학부의 교양 과목을 필요 이상으로 이수했다. 채점 기준이 명확한 수학 과목보다는 나의 의견과 생각을 정리하여 상대방과 토론하고 서술하는 수업이 더 재밌었고 자신 있었다. 아마 그래서 부전공으로 과학기술정책을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공부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게 있다면 학부 과정 동안의 전공 수업보다는 지금처럼 연구할 때가 더 나은 것 같다는 점이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2진 법처럼 양분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제로섬 (zero sum)’이나 ‘양분법 (dichotomy)’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데 연구에서는 미리 답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시할 수 있는 가설도 여러 개고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 물론 그만큼 실험을 더 하고 데이터를 더 만들어서 좁혀나가는 과정도 과학적 연구이긴 하지만. 그리고 곧바로 유의미한 데이터를 얻어 앞으로 쭉쭉 나아가 발표용 포스터도 만들고, 구두 발표도 하고, 상도 받고, 장학금도 받을 수는 없지만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는 것들이 참 많은 것도 “연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행착오만 계속되면 지도교수님도 그리고 본인도 많이 고달프겠지만 말이다.)


특히나 “연구실”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 것 같다. 모두가 열심히고 본인의 연구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잘하고 싶은 마음 그대로 노력한다고 무조건 열매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어느 순간부터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시간이 무의미했나? 그건 절대 아닌 것 같다. 왜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다음엔 어떤 전략을 펼쳐서 답에 더 가까워질 것인지 충분히 고민하고 대화를 나누고 노력한다면 다음엔 더 달고 과즙이 가득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리도 중요시하되 과정에도 무게를 둘 줄 아는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그 감정을 느끼고 차가운 기술에 따스한 인간의 감정을 녹여낼 수 있는 과학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 연구실 동료들과 꽃집에 다녀왔다. 때론 형식적인게 좋을 때도 있다. 굳이 표현해야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삶도 쉽진 않겠지만 대학원 생활 동안은 본인이 잘하고 있다는 이정표 (milestone)이 없다. 분기별로 나오는 성적표도 없고 교수님에게 주기적으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나태해지고 있는 스스로의 라이프 스타일은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고 건강한 자극이 필요하며 공감이 가득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나도 감수성이 꽤나 풍부한 편이라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을 많이 쓰는 편이다. 필요 이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려다 오히려 소중한 인연을 잃은 적도 많고, 눈치만 보다가 소통의 기회를 잃어 답답한 상황이 초래된 적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 역시 연습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지레 겁먹고 혼자 미리 걱정하는 대신 차근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다. 요즘은 (힘들지만) 조금씩 더 연습하고 있다. 선배와의 대화에서도 조금 더 대범하게, 예의를 지키지만 고민하고자 하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후배와의 대화에서도 내 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상황에서 많이 배웠는지 자세히 알려주곤 한다.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라 아주 조금은(?) 사람을 타긴 하지만 그래도 모두와 프로페셔널하게 잘 지내는 법을 연습하고 있다.

그래도 바쁜 연구 생활 중 함께 시간을 내어 마음을 돌보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더 연대하고 더 위로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최근엔 예상치 못한 변화들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감수성이 더 풍부해진 적이 있다. 나 역시 내 감정을 돌볼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런 나를 보고 “그래도 감정이 차고 넘치는 공대생이 더 필요하다”는 위로를 이야기를 해준 선배가 있다. 앞으로도 나는 뇌뿐만 아니라 심장도 함께 반응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 알고리즘을 통해 조직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생각할 줄 아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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