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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의 부재 속 넘쳐나는 억울한 꼰대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by 성급한뭉클쟁이

오지랖과 조언,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두 개념이다.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더 자주 화두가 된 주제이다. 어디까지가 조언이고, 어디부터가 오지랖인가? 그 “어디”를 정의할 수 있는 애매한 “선”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이런 선은 무형 (無形) 인가, 또는 유형 (有形) 인가?


오지랖과 조언 사이를 가르고 있는 그 “선”에 대한 질문은 일목요연한 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굉장히 심도 높은 질문이다. 조언자와 피 조언자 간의 이해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두 사람이 (또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주고받은 대화 내용의 어투, 표정, 제스처, 그리고 맥락까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정말 많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마크로 (macro)’한 대규모 의제에 대해 “케바케다 (case-by-case)”라고 손쉽게 상황을 종결시켜버리는 것은 다소 무책임하다. 예의상, 그리고 나 역시 “오지랖”과 “조언”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과연 둘은 배다른 형제인지, 또는 서로 뿌리가 아주 다른 고유한 기원을 갖고 있는지에 고민해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각 개념의 사전적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자. 먼저 “오지랖”은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오지랖을 여미다”라고 할 수 있고 그 의미는 겉옷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앞 단추를 여매고 옷을 좀 더 추켜 입으라는 뜻인 것 같다. “오지랖”의 숙어적 표현은 “오지랖이 넓다”라는 표현으로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참견하는 면이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오지랖의 정의에 맞게 상상해보자. 확실히 겉옷을 추켜 입는데 앞자락이 넓을 필요는 없다. 알맞은 개수의 단추와 상체를 안정감 있게 가려줄 수 있을 만큼의 천조각이면 충분하다. 괜히 앞자락이 과도하게 넓거나 길면 치렁치렁 끌리기 십상이고 보기에도 깔끔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오지랖이 넓다”는 숙어가 탄생한 것 같다. 굳이 넓지 않아도 되는 앞자락 때문에 초래되는 불편함처럼, 굳이 참견하지 않고 편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꼭 몇 마디씩 보탰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오지랖이 넓은 오지라퍼”라고 명명한다.


“조언”은 오지랖처럼 숙어적 의미가 담긴 언어가 아니다. 한자어 그대로 “도움이 되는 말”이다. 이는 말로 전할 수도 있고, 글로 적을 수도 있고, 적힌 글을 읽어서 조언으로 소화해낼 수도 있다. 그 방법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조언자가 피 조언자에게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서 “도움”을 주는,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모든 문제는 각기 다른 “도움”의 정의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조언자가 정의하는 “도움”과 피 조언자가 정의하는 “도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순수하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들, 상대방이 조언 이상으로, 비판으로 받아들이거나 더 심한 경우 비방으로 인지한 경우 조언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피 조언자는 마음을 다치고 그 문을 굳게 잠가버리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어 한 대학원의 실험실을 상상해보자. 대학원생 아무개는 n연차 연구실 학생이다. 다가오는 새 학기에도 어김없이 후배가 생겼다. 대학원에 새롭게 입학한 신입생이 연구실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아무개는 자신의 신입생 시절의 추억에 감회가 새롭고 추억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의 올챙이 시절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한다. 내가 불편했던 점들, 먼저 같은 길을 걸으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자갈돌은 주워 저 멀리 던져줄 수 있을 선배가 없었기에 내가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많은 날들의 우여곡절이 생각나 울컥하고, 서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아무개는 생각한다, 후배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내가 막아줘야지. 시행착오로 낭비될 시간은 나 한 명으로 족하다고!


아무개 씨가 후배를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음, 그리고 그가 공동체를 위해 “시간 낭비”라는 비효율적 희생은 본인 하나로 충분하다고 다짐하는 이 마음은 충분히 박수갈채를 받아야 마땅할만한 기사도 정신이다. 일부러 더 과장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다. 얼마나 순수하고 고마운 마음인가? 그렇게 아무개는 후배들이 필요한 실험 방법, 데이터 분석 방법, 추천할만한 수업, 논문 스터디 등 내가 알고 있는 유용한 팁을 긁어 모아 사사건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후배들에게 조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개의 그토록 훌륭한 마음을, 후배들은 충분히 환영할까, 아니 인식하기는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충분히 선배 아무개의 노력과 순수한 의도를 인지한 경우 연구실 생활은 모든 구성원에게 장밋빛이다. 부족한 본인의 시간을 할애해서 후배를 위한 밑거름을 마련해주다니, 후배로서 크게 감동할만하다. 둘 사이의 믿음은 더욱 두둑해질 것이며 후배 역시 실력을 쌓은 후에는 둘 간의 시너지 가득한 협업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후배 역시 본인의 후배에게 같은 방식으로 유용한 팁을 전달하는 ‘전통’을 이어나갈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후배들은 선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아니 알아주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이유는 선배가 진정으로 나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그 진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진심을 몰라줬다는 건 어느 쪽에서든 소통이 부족했다는 건데 사실 이는 후배의 잘못, 또는 선배의 잘못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나눠 한 사람만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각자의 상황과 그에 따른 사유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만약 반드시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서로 더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의 가치가 쉽게 폄하되도록 방치한 한 사회의 분위기를 탓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상황을 후배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며 아직까지는 실수가 용인되는 몇 안 되는 수습기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실수하며 그동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배워가려고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던 중 선배 아무개는 끊임없이, 틈 날 때마다 나의 실수를 관찰하고, 실수를 발견하고, 이를 정정하기까지 이른다. 심지어 앞으로 더 잘해볼 수 있는 과제를 전달하며 다음 시간엔 직접 검사를 맡으라고 선언한다. 맙소사, 생각만 해도 어지럽고 두통이 밀려온다. 나 역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바로잡히고, 더 관찰당해야 하며 과제까지 검사 맡아야 한다고? 내가 대학원에 온 건지, 콩쿠르 준비를 위해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것인지 헷갈릴 것이다.


선배 아무개는 더 잘 알려주고 싶고, 후배 역시 더 잘하고 싶다. 이렇게 더 잘하고 싶다는 공통된 목적의식에도 불구하고 둘 간의 “소통” 사이에 오해만 쌓여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만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은커녕, 비호감도만 증폭되는 것이다. 선배는 아무리 잘 알려줘도 따라오기를 거부하는 후배를 이해할 수 없고, 후배는 자신의 실수만 기다리는 듯한 선배를 관음증 환자 취급하기에 이른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둘 사이 오해의 기원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정 (情)’을 확인할 새가 없었다는 점이다. 동료로서의 정(情)이 아닌, 실제 “내 사람”으로서의 ‘정(情)’ 말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정(情)’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꼭 “내 간도 빼서 줄 수 있는(?)” 격한 애정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이 나를 아끼는구나”라고 서로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순간들의 기초공사가 탄탄해야 오고 가는 소통의 전달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언보다 정(情)을 먼저 주고받아야 상대방이 내게 건네는 말이 얄미운 비판이 아닌 애정 어린 조언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메시지를 곱씹어보아야 수많은 팁들이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토록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하기엔 현실적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는 정(情)을 주고 받을 시간이 많지 않다. 우선 일을 해야 아웃풋을 낼 수 있는데 서로를 알아가고, 정(情)을 쌓기엔 시간도, 에너지도, 자원도 부족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갈수록 개인주의가 주 추세가 (major trend)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나의 소중한 개인 시간을 할애해 원치 않는 정(情) 쌓기를 강요당하거나 자연스럽지 못한 어울리기 (mingling) 시간이 계속된다면 이 역시 또 하나의 스트레스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동안 강요된 “회식 문화”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정(情)을 강요하기엔 개인의 시간도 존중받아야 하고, 그렇다고 정(情) 없이 말만 앞선다면 “조언”대신 “참견”의 오해를 살 수 있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이 있을까? 허무한 결론일 수 있지만 우리는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情)이라는 감정은 더 이상 기본 값이 (default)가 아니다. 개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감정도 아니고, 스위치 켜듯 OFF에서 ON으로 켤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급하게 서로를 알아가거나, 필요한 단계를 건너뛰는 대신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로의 성향, 소통 방식, 일하는 스타일과 추구하는 목적, 그리고 가치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거치며 “도움”의 정의를 동기화하고 공통된 목적에 대해 논의하고, 어떤 꿀팁이 있는지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럼 시간을 갖는 동안에는 어떻게 하냐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되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자. 정(情)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고, 합의가 (consensus) 형성될 때까진 서로에게 시간과 관용을 허락하자. 속도에만 집착하는 대신 천천히 다가가는 방법이 나중의 협업, 동료애, 그리고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더 효율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잡아당긴다고 빨리 출력되는게 아니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결국 영수증을 잡아 뽑고야만다, 천천히라도 그 충동을 이겨내보자.

한국인이 정(情)의 민족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삶의 속도가 너무 빨라지며 우리는 서로에게 정(情)을 느끼고 주고받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빼앗긴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서로에게 편안한 속도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꼰대”와 “버르장머리 없는 후배”의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천천히, 충분한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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