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커피 온기를 누리며 잠깐 거리를 걷기로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고 재즈 담은 헤드셋을 장착한다. 삐빅. 세기의 발명은 단연 노이즈 캔슬링이다. 이제 천천히 사무실까지 걸으며 재즈에 맞춰 보이는 장면들에 나름의 연출을 덧붙여 본다.
미처 예보를 확인하지 못해 지하철 처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아주머니, 이때다 싶어 자기 우산을 슬쩍 가방에 넣고 ‘우산 같이 쓰자!’하는 남학생, 빗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젖은 바지로 길바닥을 쓸고 다니는 힙합걸. 모두가 나의 왈츠에 맞춰 춤을 춰주는 배우들 같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다 첨벙. 슬리퍼가 거의 물에 잠기는 작은 웅덩이를 만나 버렸다. 낮은 지대와 더불어 어떤 연유인지 바닥이 깨져 그곳으로 빗물이 모이고 있었다. 다들 요리조리 웅덩이를 잘 피해 가는데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피하지 못했나 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 ‘웅덩이’, ‘높고 낮음’에 대해 사색에 잠겨 보기로 했다.
빗물은 마치 자본의 흐름 같다. 마치 애초부터 길을 알고 있었다는 듯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 낮은 곳을 찾아 메꾼다. 메꾸고 나면 흐른다. 구름에서 산으로, 산에서 땅으로, 땅에서 결국 바다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든다. 흐름은 ‘높음의 탐욕’을 멀리하게 하고 ‘낮음의 게으름’을 벗어나게 한다. 곧 흐트러진 것들의 질서를 잡아주고 규칙이 되고 길이 된다. 그래서 수많은 빗방울들은 토독토독 우산을 두드리며 바다가 되는 길을 찾아 흐르고 있나 보다.
또한 빗물은 어디에 도움이 필요한지를 알려 준다. 싱크홀이 생기고 있는 도로, 기울기가 안 맞아 웅덩이가 생긴 인도, 이가 하나 빠져버린 블록을 마치 빨강펜 선생님의 그것처럼 표시를 해 준다. 순간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런 문제는 누가 해결하는 거지?’
걸음을 멈추고 요즘 내외 중인 네이버를 찾았다. 검색에 검색을 거쳐 누군가가 도로 사진을 찍어 해당 관할구청에 민원을 넣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내가 걸어왔던 몇 km의 모든 길을 찍어서 민원을 넣을 수는 없었다. 특정 도로명을 기입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부분적으로 해결할 심산이 분명하니까. 잠시 눈을 감고 걸어온 길을 떠올려 본다. 아, 역시 가장 위험해 보였던 인도와 차도가 만나는 곳에 생긴 웅덩이가 우선이다. 불편함보다 안전이 우선이니까. 그렇게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창이 떴지만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순간 지금까지 비 오는 날마다 나의 허벅지 근육을 자랑하듯 물 웅덩이를 힘껏 피해 점프 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크고 작은 문제를 보고도 힘껏 피해 갈 궁리만 하며 살았다. 늘 그렇듯 ‘누군가는 해결하겠지’라는 생각이 뜬볼 안타를 허용하는 법이다. 잠깐 생각을 멈추고 펜을 잡는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떠오르는 문제의식들을 손글씨로 적어 본다.
‘내 신발이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면 이 빗물 웅덩이를 해결하려고 했을까?’
‘누군가 다치거나 피해를 봐야만 문제를 인식한다면 '망우보뢰(亡牛補牢)'와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놓치고 있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빗물 웅덩이는 무엇인가?’
생각의 스위치를 끄지 않은 채 화장실에 슬리퍼를 세워 말려 둔다. 주르륵. 슬리퍼 앞쪽에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흘러 화장실 바닥면에 닿아 하수도로 흘러 들어간다.
‘그래, 일단은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계속 관찰하는 게 중요하구나. 깊게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먼저 세상의 흐름을 읽어낼 눈을 기르자!’
그렇게 빗물에 대한 사색의 시간은 나를 다시 책 앞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잡았다. 호모 데우스를 읽어볼수록 사회 곳곳의 문제를 이미 알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흐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댐’을 만들어 소유를 늘린 사람들이 보인다.
어느덧 ‘시대를 읽는다’는 것이 ‘돈 버는 방법을 많이 안다’의 의미로 쓰이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아니다.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시대를 읽는 통찰’은 어디에 더 긴급한 도움이 필요한지를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힘이다.
자본의 증식이 지식 습득과 성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공부와 독서의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교보문고 사이트를 들러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카테고리를 내림차순 해본다. 흐름을 보니 여기에도 몇몇 거대한 댐이 보인다. 동시에 후기글 속에서 부서지고 뭉개진 마음의 웅덩이들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