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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Dec 03. 2018

웰컴 백, 제이슨 본

<본> 시리즈와 유럽

여기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있습니다. 등에 두 발의 총상까지 입은 그가 깨어난 곳은 지중해의 어느 어선 위. 어부들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상태입니다. 유일한 단서는 한 스위스 은행의 계좌번호. 가까스로 스위스의 은행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파리에 살았고 이름이 ‘제이슨 본’이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웬걸. 은행 보관소에 그는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이 박힌 여러 개의 여권과 권총, 현금 뭉치 등도 함께 발견합니다.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


21세기 첩보 액션 장르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고 평가받는 <본> 시리즈. 최근 <제이슨 본>으로 9년 만에 돌아온 ‘제이슨 본’ 시리즈의 출발인 <본 아이덴티티>(2002)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CIA 비밀병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기나긴 여정의 출발은 유럽의 한복판이었던 셈이죠. 1편에서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 스위스에서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미 대사관에서 우연히 만난, 시리즈 전체에서 유일하게 본이 사랑하게 되는 마리(프랭카 포텐테)라는 여성과 함께 말이죠. 그 이후, 3부작, 아니 <제이슨 본>까지 4부작까지 이어지는 동안 제이슨 본은 스위스와 파리, 인도와 베를린, 런던과 모로코, 모스크바와 그리스, 그리고 뉴욕과 라스베가스 등 유럽을 본거지 삼아 거의 지구를 횡단하는 듯 한 광활한 행보를 자랑(?)하게 됩니다. 거대 조직의 쫓기는 넘버1 스파이의 운명이랄까요.


<본> 시리즈가 전 세계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액션영화 장르 전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다양합니다. 일단, 캐릭터 자체의 매력.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역으로 추적해 나가는 스파이는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소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획자로 참여하기도 한 로버트 러들럼의 원작에 기인한 설정이죠. 여기에 할리우드 특유의 리듬감 넘치는 편집과 CIA 조직이 보낸 킬러들과의 혈투, 깔끔하면서도 투박한 액션신이 흥미를 더했습니다. 지금 보면 귀여운 청년 느낌이 물씬 나는 맷 데이먼의 무표정하고 과묵한 연기도 좋았고요. 여기까진 1편 <본 아이덴티티>부터 장착됐던 설정입니다. 2편 <본 슈프리머시>부터 참여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특유의 빠른 편집과 힘이 넘치는 액션 촬영, 성룡에 버금갈 사실적인 맨몸 액션으로 액션영화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후 나온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 역시 이러한 ‘본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을 정도죠. 자신의 실명도 알게 된 후 뉴욕으로 향해 시리즈를 마무리 짓는 3편 <본 얼티메이텀>은 파워풀한 액션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죠. 더욱이 폴 그린그래스의 본은 킬러로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에게 복수 3부작이 있다면, ‘본 시리즈’는 속죄 3부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할까요. 살짝 아저씨가 되어 돌아온 <제이슨 본>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리스에서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향합니다. ‘스노든’ 시대이니 만큼 정보전이 더 중요해졌고요. 살짝 후속편이 암시되기도 하니, 아직 못 보신 분이라면 9년 만에 돌아온 본을 알현하시기 바랍니다.


본 시리즈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바로 살짝 차갑고 무표정한 유럽의 풍광입니다. 원체 시리즈 마다 기본 3~4개국에 걸친 로케이션을 소화하는 대작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서 특히 미 CIA와 동떨어진 유럽은 본에게 홈그라운드와 곳이기도 하거든요.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공간은 바로 <본 슈프리머시>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과 <본 얼티메이텀>의 런던 워털루 역입니다. 기본적으로 명장면에 가까운 스릴 넘치는 액션신이 펼쳐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실제 유명 공간에서 대규모 군중을 동원해서 찍은 장면이거든요.


독일의 알프레드 되블린 작가 쓴 동명의 소설 제목이자 영화 <굿바이 레닌>에 등장하기도 했던 시계탑이 우뚝 선 알렉산더 광장은 동베를린의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죠. 분수대를 중심으로 역사 바로 옆 TV타워는 물론 백화점과 쇼핑가가 늘어서 있어 늘 인파가 붐비는 곳이기도 하고요. 영민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2편에서 본이 처음으로 CIA 간부와 접선하는 공간을 바로 이 알렉산더 광장과 시계탑을 설정했거든요. 영화 속에선 때 마침 혼란을 가중시키는 시위대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장기가 바로 이러한 군중들 속 속도감 있는 카메라 움직이거든요. 왠지 서늘한 베를린의 겨울 공기와 알렉산더 광장의 광활함과 함께 제이슨 본의 긴박함을 관객에게 잘 전달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3편 <본 얼티메이텀>의 런던 워털루역 시퀀스는 여기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명장면입니다. 워털루 역은 한 해 이용객 수가 약 1억 명에 달할 만큼 엄청난 위용과 이용률을 자랑하는데요. 2006년까지 유럽 전역을 잇는 유로스타의 영국 종착역이기도 했죠. 이른바 ‘하이테크 디자인’을 대표하는 역사로 손꼽히고 있기도 하고요. 3편에서 본은 자신을 쫓는 이들의 행방을 위해 영국 가디언지 기자와 접선을 하는데요. 이 때 킬러가 나타나자 본은 기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합니다. 최근 한 잡지가 뽑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본> 시리즈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했던 이 워털루역 시퀀스는 빠른 편집과 긴박함을 강조하는 촬영, 음악까지 앙상블을 이루며 액션영화 역사상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많은 역사 내 사람들이 엑스트라가 아닌 실제 이용객들이었다고 하네요. 촬영 당시에도 전투를 방불케 하는 역동적인 현장이었겠죠? 실로 다채로운 유럽의 도시들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본> 시리즈. <제이슨 본>의 개봉과 함께, 여러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와 장면은 무엇이었는지 곱씹어 보는 것도 시리즈를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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