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우드 펀딩 1억 모금 달성한 애니메이션 <태일이>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 포스터.ⓒ 명필름 , 스튜디오 루머
"이 영화 순수 제작비는 한 25억 정도 예상하고 있고요. 최근에 공기관으로부터 꽤 큰 금액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 애니메이션이 일반 영화 전문투자사로부터 투자받는 건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이 영화를 지지하고 또 만들어지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는 분들로부터 후원 형식으로 금액을 조달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데요. 1억 원을 목표로 삼고 있고 내일이 마감인데 거의 95% 정도 달성했습니다."
목표까지 5%를 남긴 시점이었다. 지난 18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명필름이 제작에 나선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제작 여건과 크라우드 펀딩 진행 상황을 자세히 전달했다.
그러면서 심 대표는 "금액도 금액이지만 거기에 참여해 주시는 수천 명의 그분들이 어떻게 보면 나중에 이 영화의 응원군이고 지지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서 모든 제작비를 조달하는 건 아니고 이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응원을 요청 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요청에 '전태일 열사'를 기억하는 1만여 명이 넘는 일반인들이 화답했다. 명필름이 지난해 11월 20일부터 카가오같이가치에서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이 모금 마감일인 어제(19일)까지 1억을 돌파, 총 1억253만524원의 기부액을 기록했다.
▲카카오같이가치 크라우드 펀딩 <태일이>가 20일 모금 금액 100%를 달성했다.ⓒ 카카오같이가치
명필름은 20일 "이번 모금의 참여 건수는 카카오같이가치를 통해 직접 기부한 인원이 2709명, 응원 및 공유 등으로 참여한 인원이 1만3978명, 전태일 재단 계좌를 통해 입금한 인원이 552명으로, 중복 참여를 고려해도 1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모금에 참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수호 전태일 재단 이사장은 "모금 열기가 높아 놀랍고도 고맙다"며 "모금에 참여해주신 국민 여러분 바람대로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영화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앞서 지난 7일 전태일재단과 명필름 측은 모금 달성 60% 돌파 소식을 알렸다. 영화 <카트>, 드라마 < SKY 캐슬 >의 염정아, 영화 <극한직업>의 진선규를 비롯해 문성근, 문소리 등 배우들과 단병호 평등사회교육원 이사장,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박용진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까지 지지를 보냈다.
마감까지 2주여 앞둔 시점에서 정치계, 노동계, 문화계 인사들의 응원 영상이 공개되면서 관심이 이어졌다. 이들의 동참 호소가 1억 원이란 목표액 돌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쏠린 이러한 관심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태일이>
▲카카오같이가치 크라우드 펀딩 <태일이>가 20일 모금 금액 100%를 달성했다.ⓒ 카카오같이가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처절한 외침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던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재단사이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였던 아름다운 22살 청년 전태일. <태일이>는 전태일 50주기를 맞는 내년 11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인 애니메이션이다.
과거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이은 대표와 <카트>를 제작한 심재명 대표의 명필름이 전태일재단과 함께 제작하는 '또 하나의 노동자' 이야기가 될 <태일이>는 <고래가 그랬어>라는 어린이 잡지에 연재됐던 최호철 작가의 동명의 만화가 발단이 됐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읽은 <전태일 평전> 이후 청년 전태일의 일상을 "제대로 그린 만화를 보고 굉장히 뜨거운 감동을 다시 한 번 받았다"는 심 대표는 이후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만화 연재를 꼼꼼히 다 읽은 다음에 그렇다면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어른 관객뿐만 아니라 이 땅의 청소년 관객도, 어린이들도 보고 알 수 있고 좋아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6년 전부터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다가 최근에 몇 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완성했고 지금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캐릭터 디자인 작업하고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지금 제작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심재명 대표,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중에서)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가 영화화 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25주기인 1995년 11월 13일 개봉한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크라우드 펀딩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일반 투자자 모집을 통해 제작비 10억 중 상당 금액을 모았다.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 예고편 캡처.ⓒ 명필름 , 스튜디오 루머
2만 원 이상 투자한 개인 후원자들이 7천여 명에 달했고,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엔딩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다. 25년 뒤에 선보일 예정인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아름다운 '전통'(?)을 잇고 있다고나 할까.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그림 작업 등 애니메이션 초기작업에 돌입했다는 <태일이>는 1차 크라우드 펀딩 금액을 캐릭터 디자인 및 배경 아트워크 완성에 쓸 예정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엄밀히 말해 온전히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에 집중한 작품은 아니었다. 수배자 신분으로 도피 생활 중에 전태일 평전을 쓰는 지식인 김영수와 공장 노동자 신정순의 현재와 전태일의 과거 이야기가 교차되는 가운데, 과거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1990년대 노동 운동의 현실을 아우르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반면 최호철 작가의 <태일이>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전태일의 일대기와 당시 시대상에 집중한 작품이다. 온전히 전태일의 생애를 조명하는 첫 번째 작품인 셈이다. <카트> < 1987 >의 김경찬 작가와 <화장>의 송윤희 작가 등 여러 작가들이 협업, 최근 작업을 마쳤다는 <태일이>의 시나리오가 어떤 방향과 시선을 품었을지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심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 예고편 캡처.ⓒ 명필름 , 스튜디오 루머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그분의 삶을 되돌아보니까 영화적으로 구성하기가 참 어려웠어요. 이 분은 거의 예수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가늠하기 어려운 희생정신이라든가,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거꾸로 너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친근한 우리 옆집 남동생, 오빠 같은 그런 존재이기도 했고. 그리고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를 비롯한 남매들하고의 우애라든가 그리고 또 자기의 어떤 정체성에 대한 청년으로서의 고민이라든가.
그래서 일반적인, 우리 주변에 있는 전형적이고 또 보편적이고 평범한 청년의 모습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그려내면서 또한 그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는 이유에 대해서 영화적으로 잘 해석하면,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또는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그려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심재명 대표,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중에서)
'세상의 전태일들'에서 '세상의 김용균들'로
<태일이>는 개별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 장르를 택했다. 국내 애니메이션 흥행 1위인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명필름과 '젊은 피' 홍준표 감독이 빚어낼 조화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심 대표는 <태일이>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게 된 이유로 아래 두 가지를 꼽았다.
"고증이라든가 이래서 이 만만치 않은 이야기를 굉장히 많은 제작비를 들여서 실사로 만드는 것도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관객층한테 전달해보자라는 그 두 가지 의미 때문에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극장에 개봉하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심재명 대표,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중에서.)
확실히 25년 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아쉽게도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태일이>가 기본적으로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장르를 선택한 만큼,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무턱대고 어둡거나 진지하게 그리는 것과는 거리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심 대표 역시 <태일이>가 "애니메이션 특유의 아름다움이나 수려한 영상 속에서 전태일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그려내려고 한다"고 밝혔다.
"김용균 청년 비정규직의 안타까운 희생이 참 많은 계기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는 2018년의 또 한 명의 전태일이었고 그의 어머님이 또 한 분의 이소선 어머니셨다."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 김용균씨 민주사회장 영결식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고인을 애도하며 헌화하고 있다.ⓒ 유성호
이달 초 난항 끝에 고 김용균씨의 장례 일정이 확정된 직후, 송경동 시인이 공개한 추모 글 중 일부다. "청년비정규직 김용균은 또 한 명의 전태일이었다"는 문장이 가슴을 때린다. 그렇게 50여 년이 흐른 지금, '세상의 전태일들'이 '세상의 김용균들'로 바뀐 것 뿐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외적인 노동 조건이나 임금 조건은 나아졌을지언정, '세상의 김용균들'을 사회적 타살로 몰아가고, 미래를, 희망을 빼앗는 구조적 현실은 여전히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50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개봉 이후 25년 후에 관객들과 만나게 되는 <태일이>는 분명 시사하는 바나 그 의미가 남다를 것으로 보인다.
"외주화 문제라든가 또는 지금 비정규직 제도를 악용한 여러 가지 문제라든가 그리고 갑이 아닌 어떤 을과 을끼리의 갈등을 부추기는 프레임이라든가. 그런 상황들을 보면 그때(1970년)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정교해졌지만, 여전히 청년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을 중의 을'들이 힘든 세상인 것만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태일의 삶 또 전태일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이 사회에 얘기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심재명 대표,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인터뷰 중에서)
이번 크라우드 펀딩 '1억 모금' 달성 소식이 이 <태일이>의 여정에 기분 좋은 출발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