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성 잃은 지상파' 연구 주도한 교수와 '조선'의 책임 떠넘기기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방송 <고칠레오> 6회 방송분 중 한 장면ⓒ 노무현재단
"조선‧중앙‧동아만 딱 떼서 '한국 거대 신문 보도에서 드러난 정치적 편향성에 관한 연구'를 하면 야당 편향이 9대 1쯤 되지 않겠어요?"
지난 19일 공개된 노무현재단의 <유시민의 고칠레오>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이렇게 물었다. 이 영상에서 유 이사장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의 '박근혜-문재인 정부 시기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 평가 연구' 보고서를 근간으로 한 <조선일보>의 '공정성 잃은 지상파' 연재 기사를 다뤘다. 이 보고서는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가 3000만 원을 들여 발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상에서 유 이사장은 "지상파 방송이 친정부적으로 편향됐다는 조선일보의 연속 보도가 진짜인지 아닌지 검증해 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결론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이런 연구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유 이사장은 "만약 한겨레신문이 모 대학 연구소에 종편 4개사만 딱 떼어 연구하게 하면 JTBC 빼고는 완전히 야당 편향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어디 유시민 이사장뿐이었을까. 지난 11일부터 15일까지 14일 하루를 제외하고 무려 17개의 관련 기사를 쏟아부은 <조선일보>의 이 연재는 언론계 안팎에서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지상파 라디오·TV 시사프로그램의 편향성과 친정부·친여당 성향을 비판한 이 연재 자체가 출발부터 내용까지 편향성과 불공정성으로 점철돼 있다는 비판이었다(관련 기사 : 손석희 비판 칼럼에 감춰진 사실... 이게 진짜 '언론스캔들').
▲<조선일보>가 지난 11일 보도한 '김어준·김용민, 정부 일방적 옹호… KBS 진행자는 청와대 입성'ⓒ 조선일보
그렇다면 이 연구를 진행한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애초 지난 11일 최초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가 연구를 먼저 의뢰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 공정성에 대한 의혹을 샀고, 이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자 12일 기사에서 해당 사실을 짧게 언급, 비판을 자처한 바 있다.
최근 KBS1 <저널리즘 토크쇼J>에 출연한 윤 교수 역시 "지상파 편향성 연구는 조선일보가 먼저 제안했다"고 밝혔다. 23일 KBS에 따르면, 이 같은 윤 교수의 주장은 윤 교수측이 먼저 연구비 지원을 신청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KBS <저널리즘 토크쇼J>가 24일 방송을 앞두고 보도자료 등을 통해 먼저 공개한 윤 교수의 주장은 이랬다.
먼저 연구 제안한 '조선'의 사실 은폐?
▲24일 방송을 앞두고 하루 먼저 공개된 <저널리즘 토크쇼J> 예고ⓒ KBS
"작년 9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선일보에서 미디어 영역을 담당하는 기자분이 저한테 전화해서 최근에 지상파 방송, 특히 어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의 편향성 같은 것이 심각하다고 보고 저희가 취재를 하는데 저한테 전문가로서 의견을 좀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즉답을 거절했습니다. 몇 개의 사례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고, 맥락을 빼고 특히 인용했을 때는 정말 심각하게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 저는 반대했고, 그래서 좀 이렇게 어떤 정서적으로 이런 기사는 쓰지 마라."
그러자 <조선일보>는 일주일 뒤 다시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단순 기사가 아닌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종합적으로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연구를 수행해 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한 의도를 접한 윤 교수는 그제야 연구를 수락했다고 한다. 윤 교수는 그러면서 재차 <조선일보>가 먼저 발주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서 제가 굉장히 놀랐고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기회가 되면 그런 연구를 수행하고 싶었고, 그래서 수행을 하게 된 연구입니다. 조선일보가 왜 발주를 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한테 먼저 연락이 왔고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은 비공식적으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그쪽에서 당연히 연구 제안서를 보내왔고, 연구 제안서를 작성해서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 토크쇼 J>가 밝힌 <조선일보>의 해명은 완전히 달랐다. 이에 대해 KBS는 조선일보 미디어 연구소가 "2018년 9월 서울대 윤석민 교수 측으로부터 '공영방송 공정성 변화 분석 연구'에 관한 연구비 지원 신청을 받아 심사를 거쳐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며 "이 연구를 연구소가 발주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해명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조선일보가 자사가 발주한 연구 용역의 보고서를 지상파 방송사들을 공격하는 핵심 근거로 활용해놓고 그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저널리즘 토크쇼 J>의 고정패널인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 역시 "선거법상 여론조사에 대한 보도 지침을 보면 여론조사 의뢰기관과 수행기관을 밝히게 돼 있다"며 "조선일보 보도의 경우 법률에 따라 밝히는 것은 아니더라도 당연히 누구의 의뢰로 조사가 이뤄졌는지 밝히고, 자사의 주장을 펼치면 되는데 이 부분을 뺐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서로 책임 떠넘기는 <조선>과 윤 교수
▲24일 방송을 앞두고 하루 먼저 공개된 <저널리즘 토크쇼J> 예고ⓒ KBS
"학계가 연구 용역을 받아서 보고서를 쓰면 이를 언론이 받아쓰고 정치권에서 이 보도를 근거로 '방송이 불공정하다'고 공격하는 전형적 언론계·학계·정치권의 적폐 카르텔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건강한 방송에 불공정 프레임을 뒤집어씌울 게 아니라 조선일보 자신이 공정한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지난 13일 PD연합회는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의 '공정성 잃은 지상파' 시리즈를 위와 같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같은 날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역시 "윤 교수는 박근혜 정부 때 여당 추천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을 맡은 인물이며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는 외부 필진 중 한 명"이라며 "(편향성 지수를 통해) 개별 사안 경중이나 바뀐 시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 균형성만을 따지는 것이 과연 합리적 평가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윤 교수는 이러한 타당성 논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윤 교수는 "공정성이라는 개념보다는 하위 차원의 다루기 쉬운 편향성에 접근했고 시사 프로그램의 경우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공적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편향성을 드러낸다면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연구에 참여한 대학원생 5명에게 직접적인 가이드를 주지 않고 자율성에 맡겼다. 이들 학생이 정부 여당 우호적이냐, 야당 우호적이냐에 따라 -2, -1, 0, 1, 2 등의 잣대를 갖고 프로그램의 편향성을 척도했으며 판단하기 애매한 발언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토론해가면서 합의를 도출했다."
이러한 연구 자체의 공정성 역시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던 대목이다. 5일 간 1면을 포함해 무려 17개 기사를 쏟아낸 <조선일보>의 연재가 공정한지, 과연 학계에서 공인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닌 대학원생 5명이 자율적인 기준으로 판단한 잣대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같은 윤 교수의 해명에 대해 KBS 최경영 기자는 23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비판했다.
"그러니까 조선일보는 윤석민 교수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윤석민 교수는 조선일보가 발주한 걸 대학원생 5명에게 시켰으니 나는 책임 없다는 식이네요. 보도는 조선일보가 하고 책임연구원은 윤석민인데. 조선은 요즘 뭔 모략을 해도 모양새 빠지죠? 기사로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신뢰
▲24일 방송을 앞두고 하루 먼저 공개된 <저널리즘 토크쇼J> 예고ⓒ KBS
"조선일보 미디어그룹이란 곳 하고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계약을 한 거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는 그냥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에 대해서 분석하다 처음엔 라디오만 대상이었다가 TV까지 확장됐다. 그 이후 조선일보는 일절 개입한 바 없다. 모든 것은 제가 전문영역의 지식에 따라서 연구 설계하고 연구를 진행한 거다. 그 연구를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크게 다루는 것은 조선일보의 영역이다."
논란이 가열되던 지난 13일, 윤 교수는 KBS1 <오늘밤 김제동>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조선일보 보도는 조선일보의 영역'일 뿐이고 자신의 연구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같은 날 <조선일보>가 게재한 전화 인터뷰 기사에서도 윤 교수는 "이번 연구는 엄정하고 독립적으로 진행됐다"고 강조한 바 있다. <조선일보>가 발주하고, 연구 결과가 공개되기도 전에 '단독'으로 보도한 해당 연재에 대한 편향성 논란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윤 교수는 <조선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서 윤 교수는 "보고서가 공개되자 일부 매체들이 연구 내용보다 연구비를 어디서 받았는가라는 비본질적 질문으로 연구의 순수성과 의의를 훼손하려 하고 있다"며 "이번 연구를 편향적이라고 매도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강경하던 윤 교수의 입장에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그런데 어쩌나. 시간은 흘렀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조선일보>의 연재 자체가 편향됐고, 그 연구를 <조선일보>가 발주했으며, 심지어 17개에 달하는 연재 기사가 언론계 안팎에서 그 어떤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오히려 <조선일보>의 달라진 영향력을 재고하는데 이바지한 연재였다고나 할까.
아울러 윤 교수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연구를 발주한 적 없다"는 <조선일보>나, 뒤늦게 입장을 바꾼 듯한 윤 교수나 오십 보 백 보, 난형난제 수준이랄까. 아래 소개하는 지난 16일자 <미디어오늘> 이정환 대표의 <조선일보 지원 받아 지상파 저격한 서울대 교수>라는 제목의 칼럼 내용이 이를 잘 드러낸다.
윤 교수는 이에 대해서는 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또 "이런 연구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던 유시민 이사장의 일갈에, 어떤 반박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번 논란을 통해 신뢰성을 잃은 곳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는 <조선일보>가 아니라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는 아닐까.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추천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냈고 종합편성채널 출범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윤 교수의 학자적 소명과 양심을 믿어야겠지만 애초에 조선일보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지상파 방송의 편향성을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