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부정한다>와 손석희 앵커의 <뉴스룸> 앵커브리핑
▲영화 <나는 부정한다> 스틸컷ⓒ 티캐스트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미국의 한 '현대 유대사학과' 여성 교수의 법정투쟁기를 다룬다. 홀로코스트 관련 저서를 쓴 이 교수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백인 남자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국 법정에서 소장이 날라 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이 남자의 주장을 이 역사학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피고소인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법이, 영국 법이 그랬다. 심판청구인인 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는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내용과 증거를 재판부에 소명하기만 해도 된다. 하지만 이 여성 교수는 무죄 입증을 위해,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벌어졌고, 심판청구인이 얼치기 역사학자에다 히틀러 숭배자이며, 그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실마저 조작했다는 그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19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난 실화다.
<나는 부정한다>는 이 홀로코스트의 진실을 부인하는 세력과 맞서는 한 역사학자와 그를 도운 변호사들의 재판 과정을 정직하고 묵직하게 다룬다. 역사 왜곡이 왜 문제인지, 그들은 왜 돈과 노력이라는 수고와 공을 들이면서까지 역사를 왜곡하려 하는지, 특히나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은 피해자들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싸워 나가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그리고 있다. 더없이 아이러니한 전제는 피해자가 '사실'과 '진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영화가 그리는 일면은 역사를 왜곡하려는 자들의 '멘털리티'다.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 자들에게 피해자의 신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부정을 부정하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법적으로든, 현실 차원이든, 역사와 진실을 왜곡하는 이들과 싸우는 행위가 역사의 존엄이라는 거시적인 명제 외에도 '역사 왜곡'으로 인해 신음하는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역사적인 발자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마침 이 영화가 개봉한 지난 2017년, 전 대통령인 전두환씨가 <전두환 회고록>을 발간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 문제가 한일관계를 냉각시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전 세계를 강타한 '가짜뉴스'의 폐해가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2년 여가 흐른 지금은 어떨까. 제1야당의 대표를 꿈꾸는 이 중 한 명이 과감하게 과거와 진실을 부정하고 나섰다. '5.18 망언'이 나라 전체를 들썩이고, '5.18 북한국 개입설'이 버젓이 유포된다. 지금은 유튜브의 시대다. 변한 것은 없다. 아니, 더 나빠졌다.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가 <나는 부정한다>를 다시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리라.
황교안과 박근혜, 그리고 '태블릿 PC'
▲25일자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의 한 장면ⓒ JTBC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예를 들면, 독도는 자신들의 땅이 아니며 위안부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무너져 버리는 그들… 그들은 그 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한 보따리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어디 그들뿐일까… 시민을 폭도이자 괴물로 만들고, 심지어 북한군으로 만든 사람들 역시 역사의 진실을 한낱 논란거리 수준으로 격하시키면서 이미 그 이상의 정치적 이익을 챙겨낸 셈이지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5일 방송된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의 제목은 '나는 부정한다'였다. 손석희 앵커는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를,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부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세력이 챙겨낸 것이 '정치적 이익'이라고 규정한다. <나는 부정한다> 속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던 이들과 매한가지 주장이라 할 수 있다.
▲25일자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의 한 장면ⓒ JTBC
어디 그 뿐일까. 그 정치적 이익이 결국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결집이 경제적 이익으로, 또 다른 권력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은 항상 '업데이트' 되기 마련이다. 이날 손석희 앵커가 가리키는 '역사 부정론자'는 따로 있었다. 구태여 2년 전 5월 18일, 당시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을 비판하기 위해 소개했던 영화 <나는 부정한다>를 다시금 끌어 올린 것은 바로 황교안 전 총리와 박근혜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지금까지 걸어온 시민들의 시간이 조작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한 구석에선 왜 이토록 집요하게 조작설을 주장할까… 태블릿PC의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의 근원이며, 터전이며, 미래이기도 한 '그' 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라는 존재로부터 얻어낼 정치적 이익을 탐하고 욕망하는 사람들... 우리는 왜 그때마다 태블릿PC는 진실이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역사를 위한 것이 아닐까…"
전자의 '그'는 황 전 총리요, 후자의 '그'는 박 전 대통령 되겠다. 최근 황 전 총리는 자유한국당 TV토론회에서 연이은 '탄핵 불복'성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데 이어 급기야 '태블릿 PC 조작 가능성' 발언까지 내뱉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일 거다. 태블릿 PC 보도의 당사자이기도 한 손석희 앵커가 "(태블릿PC 조작 가능성…) 개인적으로 그렇게 보고 있다", "탄핵이 타당한 것인가 동의할 수 없다"는 황 전 총리의 최근 발언을 끄집어 올리며, '그', 즉 박 전 대통령의 존재를 '탐(하고)욕(망)'하는 사람들의 '멘털리티'를 까발린 것은.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를 '역사를 위한 것'이란 당위까지 역설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당위는, 우리가 직면한 당위이기도 하다. '5.18 망언' 논란이 일자 한 걸음에 서울까지 올라와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시위를 벌이는 5.18 단체들의 분노를 보라.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이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 한, 그들의 싸움은,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싸움이 '그'들과 구별되는 것은 제 이익이 아닌 '역사(와 진실)를 위한 것'이란 그 당위 아니겠는가.
"나는 부정한다,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
▲25일자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의 한 장면ⓒ JTBC
"태블릿PC의 진실을 '조작'으로 왜곡하고, '논란거리'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꽤 긴 시간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감… 아마도 훗날의 역사가들마저 '태블릿PC는 논란거리였다'고 말하는 순간, 시민들이 이룩해낸 역사적 진보는 조작이란 오명으로 더럽혀질 것이기에…"
많이들 공감할 것이다. 우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황 전 총리의 한국당 당 대표 선거 승리가 확실시되는 지금, 박 전 대통령을 지속적으로 소환하는 '그'들의 시도는 이후로도 오래도록 계속될 전망이다. '태블릿 PC는 거짓'이란 주장을 지속해온 변희재씨가 법정 구속됐다 해도 달라진 것은 없다.
손석희 앵커가 "나는 부정한다,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이란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태블릿 PC' 논란을 비롯해 앞으로도 오래도록 '역사(와 진실)를 위한 것'이란 당위 아래 불편부당과는 거리가 먼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음을 자신도, 우리도 알고 있기에.
그리고 손 앵커가 이 앵커브리핑을 전하던 25일, 복수의 매체는 경찰의 말을 빌려 지난 2017년 4월 손석희 대표가 일으킨 접촉사고 당시 피해차량의 견인차 운전자가 "동승자는 없었다"고 한 진술을 보도했다. 이는 이 견인차 운전자가 최근 여러 매체와 한 인터뷰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주장은 갈수록 확산돼서 결국 세기의 재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손 앵커는 이날 앵커 브리핑 말미, <나는 부정한다>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앞서 손 앵커 는 지난 16일 폭행과 배임 등 여러 건의 고소·고발 사건의 고소인·피고소인 신분으로 경찰에 출석, 조사를 받았다. '태블릿 PC'를 '부정'하는 이들은 연일 이 '손석희 사건'을 부각시키며 보도 당사자인 손석희 앵커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헐뜯는 주장을 일삼고 있다. 지금 유튜브에서 '손석희'를 검색해 보길.
그래서일지 모른다. 이날 앵커 브리핑과 바로 이 "그 터무니없는 주장은 갈수록 확산돼서 결국 세기의 재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는 문장이 '태블릿 PC' 보도 당사자로서 "나는 부정한다"는 스스로의 항변으로 들린 것은.
"나는 부정한다,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이란 영화 속 대사 역시 이러한 '고소인·피고소인' 손석희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향후 재판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논란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 "꽤 긴 시간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