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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Jan 27. 2021

'한국 할머니' 윤여정이 열어가는 새 지평

tvN <윤식당>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지난 2017년 5월, 배우 윤여정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소감을 남겼다.


"서진이가 메뉴를 추가하자고 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센스가 있으니 들어야죠. 우리는 낡았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편견을 가지고 있잖아요. 살아온 경험 때문에 많이 오염됐어요. 이 나이에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니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되죠.


나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어서 내가 모르는 분야에서는 전문가, 젊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요. 오픈 마인드까지는 아니고 잘 들으려고는 해요. 식당 운영에서는 서진이가 센스가 있으니 그 말을 따른 거죠. 난 남북통일도 중요하지만 세대 간 소통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 사회 세대 간 소통이 안되는 게 너무 심각하잖아요?"


요즘 말로, '윤여정이 윤여정했다'는 평가를 들을 만했다. 이 70대 대배우의 혜안은 '센스 있는 젊은 사람들'이 상주하는 트위터에서 '탈꼰대 어록'으로 기록되며 1만 회가 넘게 리트윗 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드라마와 영화로 친숙한 윤여정의 "서진이가~"라고 하는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들리는 듯하지 않은가.


그 기세(?)를 몰아, 윤여정은 당시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치러진 19대 조기대선 개표방송에 출연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당시 JTBC 보도담당 사장이던 손석희 앵커는 윤여정을 "시청자 마음을 잘 대변할 수 있는 분"이라고 소개하며 "깐깐하고 까칠한 유권자"란 촌평을 남겼다.


이에 화답하듯, 윤여정은 "낮잠을 자다 (손석희의 섭외)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었다"며 '깐깐하고 까칠하게', 또 '효자동 주민'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었다. 그 중엔 청와대 인근인 효자동 주변에서 촛불을 들던 세월호 유가족을 마주하며 느낌 단상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는 '국정농단' 관련 촛불집회의 여진이 미처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내 새끼가 거기 (세월호에) 타서 없어졌다면 저분들 심정을 누가 대신할 수 없을 거예요(...). 내 아이가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분들(세월호 유가족)과 같은 심경일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그만하지'라고 하던데 내 아이라면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2017년 5월 9일 JTBC 특집 <뉴스룸> 1부 중에서)


꼰대력 제로, 센스 만점 윤대표

   

▲ tvN <윤스테이> 한 장면. ⓒ tvN

 

칸 국제영화제 진출작에도 출연하고, 인기 드라마와 예능까지 섭렵한 대배우도 나이를 먹기 마련이다. 실제 할머니뻘이 된 대배우의 눈에 손자뻘 젊은이들의 '예쁜짓'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 '탈꼰대' 어록으로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은 윤여정은 이런 소감도 전했더랬다.


"제(가 사는) 동네 효자동에서 나이 든 분들을 말리는 젊은 친구들을 봤어요. 촛불집회 처음 시작할 때쯤이었나. (촛불집회 현장에서) 나이 드신 분이 차 위로 올라가서 선동하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젊은이들이 끌어내리잖아요. 그래서 매니저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분이 선동하려고 하니까 젊은이들이 자제하자고 말렸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 예쁘구나 생각했죠."


그로부터 4년 뒤, 윤여정은 tvN <윤스테이>의 '윤대표'가 됐다. '서진이~' 이서진은 '부사장'이 됐고, '인턴' 최우식을 비롯해 <윤식당>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배우 정유미, 박서준 등이 직원으로 '열일' 중이다. 그런 '윤대표'에게, '꼰대력'이란 찾아볼 수 없는 미덕(?) 되겠다.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배경으로 외국인 손님들과의 '티키타카'가 재미 요소인 <윤스테이>에서, 윤여정은 예의 그 깐깐함과 까칠함을 동반한 유머와 위트, 여유를 통해 능수능란한 '소통의 장인'으로 활약 중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이런 장면. 저녁 메뉴를 고르는 두 외국인 남성을 접대하던 윤대표님. 그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 "오늘밤에 우리를 독살하는 건 아니죠?"라고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돌아오는 윤여정의 답이 걸작이었다.


"오늘밤은 아니고. 뭐 봐서, 내일이나. 체크아웃한 후엔 장담 못하고."


간단해 보이는 영어 대화로도 한참이나 어린 남성들을 폭소에 빠뜨리는 윤여정의 이런 '센스'는 소셜 미디어상의 화젯거리이자 <윤스테이>의 '킬링 포인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윤여정의 센스 넘치는 특유의 영어 실력은 유튜브 상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바로 현재 미국 내 영화상의 여우조연상을 휩쓸다 시피하고 있는 <미나리>의 2020 선댄스 영화제 무대인사 및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이민을 끝마치고 연기에 복귀한 윤여정의 영어 실력과 예의 그 센스와 <미나리>를 보고 감명을 받은 미국 관객들의 감흥이 만난 유쾌한 장면이라고 할까. 재미교포인 정이삭(리 아이삭 정) 감독과 스티븐 연의 진지한 답변이 이어진 가운데 마이크를 건네받은 윤여정이 좌중을 압도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답변이 정말 진지하네요. 전 저렇게 진지한 사람은 아니에요(좌중 폭소). 전 한국에서 연기를 굉장히 오래 해왔어요. 근데, 이번 영화는 하기 싫더라고요. 인디영화란 걸 알았거든요. 그 뜻은, 제가 모든 면에서 힘들 거란 얘기였죠(좌중 폭소).


근데 영화가 너무 잘 나왔어요. 우린 돈을 아끼려고 (촬영 중에)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어요. 밥도 같이 먹고, 가족이 됐죠. 제가 스티븐 연의 한국어를 고쳐주고, 스티븐은 제 영어를 고쳐줬어요. 지금이야 (극중 역할인) 순자보다 더 잘하지만, (영화 속에서) 영어를 전혀 쓸 필요가 없었긴 하지만요.


나이 든 여배우로서 정말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었어요. 전 이제 더 힘든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늙었잖아요. 하지만... 정이삭 감독이 기회를 줘서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들이 저희 영화를 함께 즐겨 주셔서 아주 기쁩니다. 정말 고마워요."


<미나리>의 저력, 윤여정의 관록

   

▲ 지난해 10월 23일 오후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미나리> 관련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배우 윤여정. ⓒ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내 영화상의 여우조연상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 윤여정의 수상 소식이 연일 화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추가될지 예측 불가다. <미나리>의 국내 배급사가 하나하나 '업그레이드'하며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이 버거워 보일 정도다.  25일(현지시각)엔 아카데미로 가는 척도라 불리는 '2020 AFI 어워즈'(미국영화연구소 시상식)의 '톱10'에 <미나리>가 선정되기도 했다(관련 기사 : '미나리', AFI 올해의 10대 영화... 아카데미 보인다 http://omn.kr/1rub3). 그에 앞서 미 유력 영화지 <버라이어티>도 아만다 사이프리드(<맹크>), 글렌 클로즈(<힐빌리의 노래>) 등과 함께 윤여정을 2021 오스카 시상식의 유력 여우조연상 후보라 전망했다.


<버라이어티>는 또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역시 니콜 키드먼, 조디포스터와 함께 윤여정을 여우조연상 후보로 점친 상태고, <할리우드리포터> 역시 엇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이들 미 유력 전문지들은 윤여정 외에도 <기생충>에 이어 한국인 감독이 만든 <미나리>가 올 오스카에서 주요 후보에 오를 것이라 예상 중이다.


<미나리>는 27일까지 도합 무려 20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한국인이 골든글러브와 오스카 후보자로서 시상식에 참석하고, 더 나아가 우리말과 영어 수상 소감을 발성하는 순간을 목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바탕은 물론 일찌감치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 등을 수상하며 완성도를 인정받은 <미나리>란 영화의 힘일 것이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건너온 한국인 할머니 '순자'를 연기한, 짧은 영어 몇 마디를 제외하고 대부분을 한국어로 연기한 윤여정이 미국 평론가들에게 각광을 받고 각종 영화상에서 수상 릴레이를 이어가는 장면은 괄목할 만하다.


사실 영화 속 '순자'가 그런 캐릭터다. 순자는 '(쿠키를 안 구워주서) 할머니 같지 않다'고 앙탈을 부리는 손자손녀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물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자라는 '미나리'(의 생명력)를 부지불식간에 가르친다. 손자의 짓궂은 장난도 너그러이 넘길 줄 아는 '쿨'한 할머니이기도 하고.


순자는 이렇게 실제 이민자 가족에서 자란 정이삭 감독이 자전적인 경험을 녹여낸 한국인 이민 가족의 여정과 고단함을 그린 <미나리>의 주요 캐릭터이다. 역할 자체나 후반부 극의 전개에 있어 드라마틱한 굴곡을 겪고 갈등 요소를 부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윤여정은 극적인 대사 없이도 그런 순자의 감정을 여과 없이 전달한다. 반세기 가까이 '로컬'에서 연기자로 살아온 윤여정의 연기가 영상 언어라는 만국공통어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니. 그 자체로 영화 밖 현실에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까지 감동을 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라고 할까.


누구도 상상 못한 새 지평

   


▲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 플랜B 


지난 2016년 윤여정은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로 제10회 아시아태평양 스크린 어워즈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호주 브리즈번에서 개최된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역시나 "반세기 가까이 연기를 했다"며 직접 영어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맞다. 1960년대 후반 TBC 탤런트로 출발, 영화 데뷔작인 거장 김기영 감독의 <화녀>로 제4회 시체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무려 1971년이었다. 이후 임상수 감독의 <하녀>로 2010년 각종 여우조연상을 휩쓴 것이 39년 만이라 화제가 됐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미나리>의 순자 캐릭터 그 자체다. 고춧가루며 멸치며, 먼 여행길임에도 음식을 싸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 할머니였다가도, 교회 헌금을 슬쩍하고 기어이 '미나리'를 냇가에 심는 면모는 상당히 독립적이고 쿨하게 비춰진다.


정이삭 감독이 그린 순자 캐릭터 자체가 주체적이고 풍성하며, 인간의 다면적인 면모를 함유하고 있는 셈이다. 도리어 우리가 TV 드라마를 통해 쉬이 마주해온 윤여정의 일상적인 연기가 <미나리>라는 영화를 만나면서 더없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캐릭터는 물론 연기 자체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은, <미나리>로 미국 관객들을 만난 윤여정의 차기작 역시 '미드'란 사실이다. 윤여정은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한 미 애플TV의 동명 드라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선자' 역할을 맡았다. 미 애플의 OTT인 애플TV가 제작, 배급하는 이 작품은 4대에 걸친 한국인 이민 가족의 대서사를 그릴 예정으로 이민호, 정은채 등이 출연한다. 


이렇게 <미나리>로서 가능했던 릴레이 수상으로 '반세기 넘는' 연기 생활의 정점을 찍은 윤여정. 앞으로 그가 미국 영화인들과 또 어떤 작업을 할지, 그 미국인들이 봉준호 감독에 이어 골든글러브와 오스카 시상식에 윤여정을 초대할지 관심있게 지켜보도록 하자. 한국 영화인들은 물론 그 누구도 상상 못했던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윤여정의 행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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