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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Sep 18. 2022

삼행시 짓던 세 학생의 스무살... 반짝이는 김민영들

장석주 시인은 2018년 발간한 시집 <스무 살은 처음입니다> 속 '내 스무 살 때'라는 시에서 자신의 스무살 시절을 이렇게 노래했다.

 

불안은 나를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둡기만 했지
그랬으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닷속을 달리는 등푸른 고등어처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으니, 산책의 기쁨도 알지 못했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을 건넬줄도 몰랐지


스무 살에 등단한 장 시인은 이 '내 스무살 때'를 "참 한심했지"란 한탄으로 시작했다. 어쩌면 수십년 뒤 되돌아보는 그 스무살의 기억은 이처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불안에 잠식당한 어두운 시절로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기억을 더듬어 보자. 나날이 아는 것이 늘어간다. 열아홉과 달리 세상이 달리 보인다. 지금까지의 성취가 불안하지만 또 어떤 확신들을 안겨주기도 한다. 고마움보단 서운함과 조급함이, 기쁨보단 불만과 따뿐함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을 나이다.


물론, 그 감정들은 개개인 마다 온도차가 뚜렷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소중함보다, 현재의 무게감보다 실날 같은 희망을 품고서라도 어찌됐든 예상치 못한 내일과 작은 미래가 확대돼 보이는 나이 아니겠는가.


이 스무 살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이 <성적표의 김민영>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 주자면 '스무 살의 김민영'이 적절할 터다. 영화제작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는 이재은․김지은 감독이 공동연출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그 스무살의 예민함들을 친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게 그려내는 사려 깊고 다정한 장편 데뷔작이다.  

▲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세상의 스무 살 청춘 '김민영들'에게

 

김,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김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를 했다.
민, 민영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영,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삼행시 클럽'이란 신선한 발상이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서의 존재 증명, 인간으로서의 효용에 대한 불안과 회의, 그에 대한 변호와 옹호, 미래에 대한 기대 등등. 주인공인 김민영(윤아정)이 고3 시절 읊조리는 본인 이름 삼행시의 내용이야말로 <성적표의 김민영>이 건네는 어떤 선언과도 같다.


그리고 이 선언은 이 작지만 큰 우주를 품은 영화가 꽤나 문학적이지 않을까라는 단서를 던져주고, 그 의문에서 비롯된 단서는 무척이나 효용성이 높다. 이 '삼행시 클럽'을 만들었을 만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김민영과 유정희(김주아)는 기숙사 생활을 같이 한 동창생 친구다.


"지금 우리는 수능 100을 앞두고 학생과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의 창작욕을 잠시 재워두려 합니다"라는 이 여학생들이 잠시 내려놓고자하는 '삼행시'는 친숙함과 반비례로 우리 영화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낯선 장르다. 이 삼행시가 사실 일본 하이쿠 장르의 창조적 변형일 거란 예상과 함께 이들의 창작욕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구현될지도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재밌는 소재다.


이후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면 좋았겠지만 세상이 어디 그리 마음 먹은대로 흘러가던가. 김민영은 졸업후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진학하고, 클럽의 또 다른 멤버 수산나(손다현)는 미국의 대학에 입학한 상태. <성적표의 김민영>은 대학 진학에 실패한 이후 테니스장에서 알바를 하며 삼행시 클럽에 가장 열심인 유정희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자연스럽다. 달라진 입장은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띄엄띄엄 화상으로 만나는 삼행시 클럽의 기온은 기숙사 생활 때와 같을 수 없다. 뭔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김민영은 모임에 불성실하다. 해외에서 접속하는 또 다른 친구는 타국 땅에서의 적응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인다.


정희는 조금 다른 길을 간다. 대학 진학에 큰 뜻이 없어 보이는데 그게 불만족스러운 것 같지도 않다. 부모의 눈에는 하릴 없는 백수 생활로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채근을 받는 쪽도 아니다. 정희는 그림이든 글이든 나름의 재능을 소유한 것 같지만 그걸 펼쳐내기 위해 안달을 하지도 않는다.


영화 자체가 그렇다. 스무 살 시절을 격정적으로 그려낼 생각이 전혀 없다. 인물에게 근접해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찍이 떨어지지 않은 카메라는 정중동의 감각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희를 다독인다. 캐릭터들이 충분히 무심한 듯 발랄한 만큼 따로 극적인 형식과 리듬을 동원할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아니, 그 자체가 영화적인 선택이자 연출 의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스무살 여성들의 감정을 솔직하고 편견없이 바라봐 주기. 그러한 부담스럽지 않은 관심이야말로 애정의 시작이자 근간이라는 듯한 연출이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성적표의 김민영'을 지배하는 주된 정서다. 그 정서는 민영과 정희가 만나는 1박2일의 후반부 장면들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  

▲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스틸컷 ⓒ 엣나인


영리한데다 사려 깊은

하나, 햇반으로 경단떡 만들기.
둘, 백덤블링 성공하기
셋, 고무동력기 5분 이상 날리기
넷, 미니 스케이트장 만들고 트리플 악셀 성공하기
다섯, 밤새서 100피스 퍼즐 맞추기
여섯, 밥 먹으면서 쏘우 보기
일곱, 삼행시 배틀
여덟, 혼자 노래방 시간배틀(옆방에서)
아홉, 블루베리 크림치즈 주스 해먹기


정희의 위시 리스트가 이렇게나 귀엽고 일상적이다. 이 캐릭터를 구축한 것만으로 <성적표의 김민영>은 절반의 성취를 이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각에서 1020 여성 청춘 서사의 모범작으로서 '2020년대의 <고양이를 부탁해>'란 언급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이고.


사실 영화 속에서 언뜻 비춰지는 이러한 리스트 속 항목들 자체가 '스무살의 유정희'를 구축하는 동력이자 동시대성을 담보해내는 매력으로 작동한다. '밥 먹으면서 <쏘우> 보기'라거나 '블루베리 크림치즈 주스 해먹기'라니,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천 소녀들은 해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재미 있는 일 아니겠는가.


'문학적'인 시선을 강조했던 것도 그래서다. '아침 햇살과 친숙해집니다/ 때때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과다 에너지는 현명하게 방출합니다'라는 삼행시 클럽의 행동강령 같은 귀엽고 일상적이며 섬세하고 독특한 시선이야말로 <성적표의 김민영>을 생기있게 만드는 특질이라 할 수 있다.


자칫 비영화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편지나 삼행시란 소재를 정희의 내레이션 형식으로 풀어낸 것 또 이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문자 텍스트를 화면 밖 소리로 치환하는 관습적이지 않은 이러한 형식은 정희의 마음과 정서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자 독특한 호흡과 리듬을 생성해내는데 성공한다.


이를 종합하여,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대"를 토로하는 동시에 "앞으로 뭘하든 그때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라는 스무살 시절 그리 특별하지 않을 희망과 바람을 놓치지 않음으로서 이 신선한 데뷔작은 보편성과 독창성을 동시에 획득해낸다.


고향이자 생활 공간을 서울이 아닌 지역으로 설정한 것도 영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공간 그 자체로 고즈넉한 분위기라 정희의 정서와 잘 조응되지만 무언가 중심이나 메이저에서 약간 떨어진 것 같은 정희의 상황이나 심경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하여 아까 언급한 영화의 후반부, 민영의 초대로 서울로 놀러 온 민영은 멀리서만 감지했던 관계의 변화나 미묘한 감정의 흐름들을 체감하고 나름의 의연한 대처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영화의 주제를 담고 있을 이 후반부 속 민영의 대처야말로 <성적표의 김민영>이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웅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역시 사려 깊고 영리하다.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비롯해 지난해 유수의 영화제를 섭렵한 <성적표의 김민영>은 2022년 한국 독립영화가 배출해낸 반짝이는 '여성 청춘 서사'의 현재형이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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