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송환>과 2022년 <2차 송환>
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편집자말]
▲ 영화 < 2차 송환 >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2004년 봄, <송환>을 본 일반 관객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장기 상영 끝에 한국 다큐멘터리 최초로 3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념비적 역사를 함께하며 극장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던 관객들 말이다.
3년 뒤 공동체 상영을 통한 다큐 <우리학교>의 10만 가까운 장기흥행 역시 <송환>의 빛나는 전례가 있어 가능한 기록이었을 터다. 제20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2004년)을 수상한 것도 국내 최초였다. 독립영화 사상 멀티플렉스 상영으로 역주행 하는 기록을 쓴 <송환>은 한국 독립 다큐가 대중과 조우하는 첫 번째 사건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 <송환>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아무래도 '조연'이었던 김영식 선생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아닐까 싶다. 실제 그랬다. <송환>의 주인공은 30여 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오랜 인고 끝에 2000년 9월 북송되는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선생이다.
역시나 이미지의 힘은 세다. 김영식 선생은 조창손 선생의 주변 인물 정도다. 그럼에도 <송환>의 포스터 속 김영식 선생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 이미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가진 어떤 순수함과 진심, 고집을 고스란히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창손 선생의 얼굴은 잊어도 김영식 선생의 파안대소는 잊혀지기 힘든 성질의 이미지였다. 김동원 감독은 김영식 선생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김영식 선생은 동정심이 많다. 길거리를 가다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신다. 김 선생 지갑엔 천 원짜리 지폐가 항상 넉넉히 준비되어 있고 그냥 적선만 하는 게 아니라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덴 없는지 잠은 어디서 자는지를 물어보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신다. (이런 장면들도 찍지 못했는데 신기한 건 그런 일은 언제나 카메라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 일어나고 준비를 하고 있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모습은 그의 '귀여움'(?)이다. 그건 아주 '토속적인 귀여움'이고 그의 꾸밈없는 성격과 한국적인 얼굴에서 나오는 것 같은데, 다행히 찍기 쉽고 많이 찍을 수 있었다."
이미지에 국한된, 만들어진 미소가 아니었다. 다큐 속 김영식 선생은 비록 조연처럼 비춰지고 무엇보다 조창손 선생보다 연배도 어리다. 그래서 더 이념적으로 더 강고했고, 심정적으로 좀 더 파고가 세보였다. 이처럼 <송환>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한국사회가 '빨갱이'라 비난하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동시에 어떻게든 객관화하고자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선생들이 예쁜 척하거나 잘난 척하는 거는 다 뺐다고. (미화를) 최소화하려고, 그래서 담담하려고 노력했다. 선생들이 드러내기 싫어했던 안학섭 선생 결혼식 장면도 그래서 넣었다. 이건 촬영이나 편집 때 굉장히 부담이 컸다고. 가장 큰 건 선생들을 완전한 존재가 아닌 보통 사람처럼 그리고 싶었지. 많이 찍어놔서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김동원 감독, 2004년 3월, <씨네21>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인터뷰 중에서
<송환>에 이은 < 2차 송환 >이 통과해 온 시간들
▲ 영화 < 2차 송환 >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그런 시절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였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부르짖는 것이 '빨갱이 좌파'와 동의어로 인식됐다. 정부여당이 개혁과제로 천명한 국가보안법 개정마저 보수 기득권 세력의 반대로 암초에 부딪혔다. 그런 시대였다. 그런 분위기 속 평단은 물론 시민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은 <송환>은 그 자체로 시대의 기록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20여 년 만에 귀환한 < 2차 송환 >은 시간에 관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세 개의 시간이 있다. 먼저 비전향 장기수 김영식의 시간. 그는 1962년 남파 후 1964년 체포됐고,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강제 전향을 당했다. 단지 그 이유로 2000년 9월 '1차 송환' 당시 명단에서 제외됐고, 이후 '전향 취소 선언'과 함께 '2차 송환' 운동을 전개 중이다.
그리고, 영화감독 김동원의 시간. <상계동 올림픽>을 위시해 1991년 창립한 푸른영상을 30년 넘게 이끌어 온 '독립영화계의 대부' 김동원 감독은 1992년부터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과 관계를 맺었고, 2004년 <송환> 개봉 이후 김영식 선생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20여 년 < 2차 송환 >을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관객과 관찰자들의 시간. 2004년 개봉 이후 18년이 흘렀다. 초등학생이 30대 청년이 되는 시간이고, 김영식 선생도 올해 우리 나이로 91살이 됐다. 그 사이, 국가보안법 개정에 공을 들였던 노무현 정부가 비참하게 막을 내리고, 보수 정권 9년과 대통령 탄핵, 광화문 촛불과 문재인 정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 2차 송환 >을 보는 일은 관객들이 자신과 자신들이 관통해온 시대를 되돌아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를 대변하는 인물들이 영화 속에 양심수후원회 김혜순 회장과 이정태 후원회원일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들인 비전향 장기수들 할아버지들을 챙기던 청년들도 이제 장년이 됐다. 국가보안법 철폐도, 2차 송환도 현안에서 멀어진 지금, 이들과 함께 나이를 먹은 관객들에게 < 2차 송환 >을 보는 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다시 김영식 선생의 시간. < 2차 송환 >은 20여 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다. 그건 이 영화가 1차 송환이 거부된 김영식 선생이 남한 사회에서 버티고 투쟁했던 기록과 동일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몇몇의 감독에 의해 몇 년에 걸쳐 김영식 선생에게 밀착한 카메라는 말 그대로 외떨어진 것 같은 김 선생의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미화없이 담아낸다.
지하철 투쟁에도 나서고, 아픈 동지를 홀로 찾아 나서기도 하며, 인연으로 이어질 뻔한 여성과 찜질방 데이트도 할 줄 안다. 이러한 김영식 선생의 일상은 어쩌면 이상과 현실이 조금은 괴리된 그때 그 시절 비전향 장기수 출신 할아버지의 남다른 투쟁기로 비춰질 법하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 이후 그런 괴리는 훨씬 심해졌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포개지는 세 개의 시간들
▲ 영화 < 2차 송환 >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장기수들이 모진 고문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처절하게 하는 존재들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 이 마음을 담아내고자 했다." (김동원 감독)
김 감독의 그 마음은 다소 투박하지만 진심어린 내레이션과 편집을 통해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는다. 더욱이 김 감독의 마음이 김영식 선생의 마음이었을 터. < 2차 송환 >은 사회정치적, 구조적 요인들로 인해 해결되기 싶지 않은 문제에 매달리는 20년 전 김 선생의 일상 속 투쟁을 집요하리만치 끈질기게 지켜본다. 그 자체로 측은지심이 발동되는 한편 기약없는 미래, 그러니까 관객들에게는 현재인 지금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그러한 반추는 2013년 이후 현재로 올수록 더 깊은 공명을 생성해 낼 수밖에 없다. 특히 문재인 정부 이후 잠시 남북평화 모드가 찾아왔던 시기, 김 선생 스스로 고민과 갈등에 빠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면부지와 같은 가족이 있는 북으로 가는 것이 맞는가. 짐작하다시피, 아직 그는 남한에 남았다. 북으로 가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가족 같은 지인을 버리고 가는 것이 맞는지 김 선생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같은 시간을 통과해온, 작금의 악화된 남북 관계를 인식하고 있는 관객들의 비감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송환>에 등장했던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사망이나 병환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진다. 그건 북으로 송환된 장기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북 분단이란 괴물과 싸우는 이들의 운명 자체가 시간과의 싸움이요, 만나지도, 교류하지도 못하는 이산가족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 영화 < 2차 송환 >의 한 장면. ⓒ (주)시네마달
그렇게 영상 속 과거와 반추되는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 2차 송환 >은 김동원 감독의 자기 고백으로 또 한 번의 변곡점을 맞는다. 후반부, 본인의 내레이션과 함께 김 감독이 북이 고향인 부모님의 가족사를 펼쳐내고 북한 촬영을 시도하는 과정이 그려지면서 비로소 < 2차 송환 >의 변곡점은 그 지향점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실향민의 자식인 김 감독 본인이 당사자성을 띠기 시작하면서, 20여 전 전과 달리 멀게만 느껴졌던 분단의 무게나 통일의 필요성이 영화 속에서 다시 현재형으로서 의미와 동시대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156분에 달하는 < 2차 송환 >이 이처럼 감독 본인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킬 때 이 기념비적인 속편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발언자이자 기록자로서 존재를 증명한다.
실제 김 감독과 김 선생의 관계처럼 '김영식의 시간'과 '김동원의 시간'이 포개진다. 그 시간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비로소 < 2차 송환 >이란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그럴 때 극장에서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 동시대를 함께 버텼거나 통과해 온 관객들의 시간도 '김영식의 시간'과 '김동원의 시간'에 비스듬히 포개지는 것이다.
그때야말로 20여 년에 걸쳐 작업한 < 2차 송환 >이란 작품이 완성되는 시간이 아닐런지. 이 자체로 한국영화에 있어 무척이나 희귀하고 소중한, 감동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