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지석 부문 출품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 영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의 한 장면. ⓒ 부산국제영화제
"꿈이 뭐예요?"
단정하고 말끔한 여성이 좀 더 어린 여성에게 으스대듯 묻는다. 일종의 면접관과 면접자인 거 같은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면접관과 마주하던 상대 여성이 못참았는지 이렇게 되갚아 준다. 통쾌한데 약간은 서글프다.
"여기서 알바하는 거랑 (꿈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다시 보니 대화 장소도 어느 카페다. 카페 사장에게 나온 질문 치고는 어딘지 허세가 잔득한 뜬구름 잡는 말이 맞았다. "무슨 커피 좋아해요?"라면 모를까. 이 대화 하나로 운동을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알바를 구하고 있는 설희(여설희)의 상황이 단박에 드러난다.
또 다른 여성 화정(우화정)은 엄마의 전화를 받고 있다. 딱 봐도 방금 면접을 마치고 나온 검은 정장 차림인 화정은 이번엔 붙을 거라 자신만만해 한다. 자신한테 하는 다짐인지,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일종의 배려인지 분간이 힘들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룸 메이트 생활 중인 설희와 화정은 목하 구직 중이다.
"코로나 조심"이란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이광국 감독의 신작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사는 거 힘들다"라고 토로하는 20대의, 취준생의 이야기다. 또 서로에게 "안개 같은 년"이라거나 "뭐가 이렇게 흐리멍텅해"라며 '디스'를 날릴 수 있는 두 여성과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편 이상 연출한 감독의 신작을 상영하는 '지석' 부문 출품작으로, 장편 <로맨스 조>(2012)로 데뷔해 지난 10년 간 <꿈보다 해몽>, <호랑이보다 무서운 손님>을 꾸준히 연출해 온 이광국 감독의 신작이다.
어쩌면 중견 감독과 조금은 거리가 멀 것 같은 20대 여성들의 1박2일을 그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은 삶의 예측불가능성을 '반짝반짝' 포착하는 출중한 연출과 특유의 유머,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진심이 돋보인다. 감독의 전작들보다 어쩌면 더 외형이지만 관객들이 신선하면서도 친숙하게 여길 젊은 여성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떤 진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자꾸 그 어려운 꿈이 뭐냐고 묻는 당신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걸 모르겠는데 어쩌라고."
동해 바다 일출을 보기 위해 무작정 향한 동해시 무박 여행에서조차 고민은 쉬이 떠날 줄 모른다. 취업이 곧 성장을 뜻한다. 운동을 하다 그만 둔 설희도, 취업에 번번이 낙방하는 화정도 지속적으로 '어른되기'를 자문해 보지만 그것조차 쉽게 결론을 낼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정하는 건 카페에서 커피 종류를 고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법이니까.
게다가, 새출발을 다짐코자 떠났던 바닷가에서 깜빡 잠이들어 버렸다. 일출은커녕 황량한 파도 뿐이다. 둘의 심정이 그런 상태다.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 1+1 음료로 배를 채웠지만 마음이 허기진다. 이대로 다시 서울로 갈 수는 없다.
그때, 설상가상 화정이 나름의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어른처럼, 진짜 혼자 살아 보고 싶다"고. 독립을 해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기한은 정하지 않았지만 동거하는 방에서 나가달라는 완곡한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 보증금은 온전히 화정의 몫이었다. 설희 입장에선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언성이 높아진다. 해명을 하다 "애처럼 왜 그래"라며 발끈하는 화정을 뒤로 한 채 설희가 자리를 떠버린다. 연고 하나 없는 동해시에서 둘은 외떨어져 정처없는 탐방길에 나선다. 자, 이제 어떤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하고 방황하는 청춘인 설희와 화정은 바로 서울로 갈 생각이 없다. 가봐야 현실의 고민들만 쌓여 있을 뿐이다. 게다가 설희는 이제 갈 곳도 없다. 그런 설희를 화정도 바로 달래줄 방법을 모르겠다. 캐릭터를 단단히 구축한 채 공간과 사건을 제시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의 진짜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중견 감독이 20대 청춘에게 전하고픈 사유와 진심
버스 터미널에 앉아 있던 설희의 눈에 "다 죽어버렸으면"이라며 공황을 일으키는 또래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동해시에 사는 지안이다. 지안은 다가서는 설희에게 "손 좀 잡아주세요. 집에 좀 데려다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도움을 청하고, 우여곡절 끝에 설희는 지안과 친구가 되기로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우연히 들른 점집에서 "서로 부족한 게 있으니까 끌어당기는 거"라는 계시 아닌 계시를 받은 화정은 잃어버린 앵무새를 찾는 여자 고등학생과 만나게 된다. 어디로 갈지 모르던 화정과 소녀 또한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다 속내를 털어 놓게 된다.
예측불가능한 둘의 따로 또 비슷한 여정을 따라 가는 것만으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절친'과의 갈등이 머리 속에서 가시지 않는 둘의 선택은 분명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연과 운명 사이에서 또래 여성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가는 설희와 화정의 차이를 지켜보는 건 무척이나 흥미롭다.
바닷가에서 주운 낡은 손거울처럼, 어쩌면 둘의 그 차이는 거울상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단순한 성격 차이일 수도 있지만 어딘지 닮은 구석도 없지 않다. 상대를 대하는 태도나 온기도, 당황스럽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마주했을 때의 반응도 사뭇 다르다.
이른바 '오지라퍼'일수도 있고, 외로움이 엄습한 상태일 수도 있으며, 일탈의 순간이 필요한 청춘일 수도 있다. 그렇게 감독은 둘의 여정을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 모든 가능성과 판단의 여지를 열어둔다.
그 20대 시절의 불안정과 불안함, 그리고 막막함을 마치 우리도 겪지 않았느냐는 듯이. 동시대에 그걸 겪는 설희와 화정과 같은 청춘들의 심정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는 듯이. 정색할 의도는 없다. 감독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살아있고, 실명을 걸고 출연한 두 배우의 연기는 생경한 듯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둘은 어떻게 되느냐고? 인생은 가까이 보면 극적이지만 멀리 보면 싱겁고 덤덤한 법이다. 마지막에야 알게되는 앵무새의 행방처럼. 다시 만난 둘의 화해보다 중요한 것은 예측불가했던 그 여정으로 이들의 '안개'가 걷혔을까 하는 점이리라.
영화의 끝부분, 달리고 달리는 설희의 모습을 나눠 붙인 컷으로 길게 찍은 장면이 인상적인 이유도 그래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 품은 그러한 사유와 진심이 스크린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