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SBS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며칠 전, '영원한 가객' 고 김광석의 고향인 대구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잠시 짬을 내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을 찾았다. 젊은 층이 반길 만하게 조성된 거리를 둘러보다 내친김에 개관한 지 꽤 지난 김광석 스토리하우스에 처음 들러봤다. 김광석이 남긴 노래, 유품, 콘서트 영상 등이 아기자기하게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추모 공간이었다.
1990년대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 김광석이 거기 있었다. 그러다 '1000회 공연' 전시물에 눈길이 갔다. 그게 다 김민기 학전 대표 때문이다. "1995년 8월 11일 마침내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는 문장을 보자 자연스레 지난 5월 방영을 마친 SBS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의 장면이 스쳐 갔다. 김민기와 김광석의 인연 말이다.
"광석이가 초창기에는 솔로 공연을 하는 것을 약간 주저함이랄까. 내 노래가 많지 않다는 데서 오는. 그때 김민기 형이 광석이한테, '세상에 노래 많다. 그 노래 중에 너에게 맞는 노래가 있다. 그런 걸 찾아서 부르면 그게 네 노래다'(라고 조언을 했어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했던 김민기의 친구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속 히트곡인 '이등병의 편지'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탄생 비화다. 인연의 시작은 김민기가 제작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김광석이 참여하면서였단다. 당시 김민기는 김광석을 '노래 못하는 애'로 단정하며 "가수 하지 마라"고 했다고. 김광석은 그러나 10년 뒤 학전에서 '1000회 공연'을 이어간 가객이자 스타가 됐고,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뒤 김민기는 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을 맡았다.
그렇게 후배들을 챙기던 그 김민기가 '광석이' 곁으로 떠나갔다. 김민기 학전 대표가 지난 21일 별세했다. 창립 33주년을 맞은 학전이 지난 3월 문을 닫은 지 4개월 만이다. 위암 투병 중 암 세포가 전이된 이후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고 한다. 학전에 이어 그도 떠났다. 다시 돌아올 것 같은 학전과 달리, 영원히.
추모의 마음은 자연스레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다시 보는 일로 귀결됐다. 지상파 동시간대 시청률 1위와 함께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만큼 역시나 귀와 눈이 호강하는 다큐였다. 그가 만든 노래와 그의 음성이 3시간 넘게 귓가에 맴돌았다. 타고난 음유시인이자 국민들의 의해 호출된 저항시인이었다. 그의 작품들과 그를 스승이라 부르는 후배들, 그와의 추억을 길어 올리는 친구와 동료들의 기억과 증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였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뒤 숱한 추모글이 소셜미디어를 뒤덮었다. 그들에게 이 다큐를 추천한다. 보신 분들에겐 다시 보길 추천한다. 김민기 이름 석 자를 모를 수 있는 청춘들에게도 감히 강력 추천한다. 마치 김민기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한 이 헌정 다큐를 말이다.
아름답고 뛰어난 최고의 예술가에 대하여
김민기는, 시대와 함께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늙지 않는 음악이 있어요. 그리고 늘 현재인 음악이 있어요. 그게 100년 전이든 지금이든 똑같이 사랑을 받고 기억될 수 있는 음악? (김민기) 선생님은 늙지 않는 시를 쓴,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아름답고 뛰어난 최고의 예술가."
학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25살에 데뷔한 세계적인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평가다. '아침이슬'이, '상록수'가 그렇다. 여전히 촛불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이 명곡을 1951년 생인 김민기는 스무살에, 20대에 선보였다. 그 시절 동료들은 김민기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그런 김민기였지만 광장을 가든 메운 인파가 한 목소리로 부르는 '아침이슬'은 더이상 '자기 노래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1987년 6월 이한열 열사 노제가 열린 광화문 현장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학전의 수많은 후배들도 기억했다. 김민기는 아무리 조르고 청해도 절대 자기 목소리로 '아침이슬'을 부르지 않았다.
김민기는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정평이 자자했다. 말과 노래를 아끼는 대신 '새로운 것'을 탐구했고, 창작의 자양분도 계속 옮겨갔다. 미술에 탐닉했던 경기중·고 시절을 지나 기타를 잡고 노래를 하면서 문학에 몰두했다. 우리 소리를 연구하다 결국 시와 노래를 서사로 승화시켜 창작극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이크를 내려놓고 창작 뮤지컬에 이어 아동 뮤지컬을 만드는 일까지 이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이슬'과 같은 그의 노래는 시위 현장에서만큼은 애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나서도 쭉 그랬다. 팬도 많았고, 이미 그 시절 레전드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김민기는 다시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던 1990년대에도 몇몇 특별한 자리를 제외하곤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노래를 "끊었다"고 표현했던 김민기는 그렇게 무대에 서는 '앞것'이 아닌 '뒷것'의 역할을 자처했다. 학전 소극장 창립 당시 인터뷰 화면에서조차 그는 단호했다. 직접 노래하는 일을 끊었을 뿐 그의 노래는 지금껏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지 않은가.
"저는 노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원래 가수의 꿈은 없어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은 제 체질에 맞지가 않습니다. 그냥 저는 만드는 역할을 해야죠."
고통 받은 예술가와 '돈 안 되는 일'
과거 그의 흔치 않은 인터뷰를 보면 '돈 안 되는 일'이란 표현이 눈에 콕 박힌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이를 두고 '지상의 조용필, 지하의 김민기'라 비유했는데, 실제 극도로 수줍은 성격이 아니었다면 '돈 되는 일'을 하는 김민기로 거듭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본인 인터뷰나 자필 기록, 후배와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는 그의 성격도 매한가지다.
대신 그는 예술의, 창작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일찌감치 고민했던 것 같다. '아침이슬' 이후 유신 정권에 의해 마이크를 강제로 뺏겼던 그는 생계를 위해 자연과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공장에서, 탄광에서, 논바닥에서 일하며 그는 '돈 안 되는' 예술과 창작이 어떻게 사회에 복무해야 했는지를 체득했고, 이는 민주화 이후 학전 소극장 설립으로 승화됐다. 김민기가 학전을 두고 추수하는 논바닥 농사가 아닌 조그만 못자리 농사에 비유한 것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위 운동권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런 정체성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독재정권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자 창작자로서 평소 긴 호흡으로 품어온 문장과 악상을 노래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무살에 만든 '아침이슬'로 인해 그는 유신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까지 끌려다니고 고문당하고 감시받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순수한 마음에 야학을 했지만 도리어 동료들에겐 유명인이자 정권의 눈밖에 난 김민기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고 한다. 시대가 그랬지만 김민기에겐 더 가혹했다.
유혹도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를 잠재우고자 '국풍 81'이란 관제 행사를 기획했고, 김민기를 이에 동원하고자 했다. 김민기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거절했다. 외로웠을 것이다. 24시간 깨어있을 수 있는 농사일을 했을 때 가장 행복했다는 고백이 꽤 깊은 잔상을 남긴다.
하지만, 김민기는 공장에서 '상록수'를 만들고, 농촌에선 불합리한 유통구조를 바꾸고자 노력했고 성과도 이끌어 냈다. 독재정권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났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선 곳을 다시 중심으로 세우고자 했던 김민기. 그 시절 그는 분명 고통받은 청년 예술가였다. 이 시대엔 그가 통과해 낸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고.
'큰 어른' 김민기
학전이, 아동극이 그의 종착역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신인 시절 설경구를, 황정민을, 조승우를, 윤도현을 발탁한 김민기의 원칙 역시 새로움이었다. 본인 역시 도전하는 입장에서 백지 상태의 순수한 연기자와 함께 <지하철 1호선>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는 대목에선 이미 레전드에 반열에 올라섰지만 그 기득권을, 상징 권력을 모두 내던져 버렸던 그의 겸허함과 순수함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앞서, 학전을 통해 김민기가 본인 몫보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계약서를 챙기고, 심지어 러닝 개런티까지 도입했다는 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대학로에서도 최초였고, 1990년대 문화예술계의 현실을 떠올린다면 가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것도 다 신인들과 공연 자체를 존중하고, 앞것들을 아끼고 애정한 뒷것으로서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리라.
아동극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웃음소리 듣는 게 그저 좋았다"며 자꾸 무대로 내려왔다는 김민기는 '돈 안 되는 일'에 매진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티켓값도 업계 최저로 받았다. 학전을 통해 신인을 키웠던 심정으로, 예술하고 창작하는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은 결과일 터다.
김민기의 이런 철학을 이어받아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학전을 아동전용극장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란 소식이다. 아마도 김민기의 철학과 유산, 그리고 노래들은 한국 문화예술계의 자산으로 오래도록 전승되고 전이될 전망이다. 그렇게, 김민기는 탄압받은 가객에서 문화예술계의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본 사람에게 울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지난 5월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연출한 김명정 PD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이다. 이를 살짝 비틀어보자면, 이제 세상 사람들은 둘로 나뉠 거라 확신한다. 지금껏 김민기에게, 그의 노래와 학전의 공연에 영향을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이들로 말이다.
그의 나이 올해로 73세. 너무나 큰 산이 너무 일찍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한대수의 노래를 김민기가, 또 김광석이 다시 불렀던 '바람과 나' 속 가사처럼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인생을,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과 같은 삶을 살았던 큰 어른이 "자유의 바람"이 됐다.
24일은 그의 발인이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르코꿈밭극장에서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의 발인식을 마치고 유가족들이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