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만 몰입 안 되는 <가브리엘>... 시청률 0%, 독일까 약일까
"(김태호 말고) 다른 이름으로 제작해 볼까 고민도 했었어요. 김태호 PD가 만든 건데, 라는 기준점이 기대치를 높이는 것도 있지만 시청자들이 받아들일 때 윤리적인 것들, 도덕적인 것들도 과하지 않게 기준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소잿거리가 줄거든요."
손석희가 물었다. 자극적인 소재가 더 용이한 타 플랫폼과의 경쟁에서 불리하지는 않느냐고. 김태호 PD는 답했다. "김태호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여론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을까 고민이 든다"고.
지난 20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 김태호 PD가 출연했다. 진행자인 손석희는 '본방 사수' 마지막 시대를 장식했던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둘러싼 영광, 현재 유튜브에서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 중인 '없는 게 없는 무한도전' 과거 영상들의 인기 등을 언급하며 플랫폼 다변화를 주제로 김 PD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 MBC를 나와 제작사 TEO를 차린 김 PD가 최근 야심차게 띄운 JTBC 예능 프로그램 < My name is 가브리엘 >(이하 <가브리엘>) 시청률이 저조하다 못해 5회 방송은 0%대에 진입했다. 최근 방송인 6회는 다시 시청률이 1%대가 되긴 했지만 '김태호의 위기', '김태호의 굴욕'이라는 기사를 막기엔 여전히 저조한 성적이다.
손석희는 위의 <질문들>에서 김 PD에게 시청률에 대한 고민을 물었다. 그는 담담했다. "단 시간에 1등을 할 생각은 없었다"며 "이 시간대 입점했다는 것만으로도 JTBC에서 신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콘텐츠 시청자들에겐 끝 기억이 좋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가브리엘>의 방송 시간은 금요일 오후 10시 반. 당초 금요일 오후 8시 30분에 방영됐지만 동시간대에 방송되는 tvN <서진이네2>와의 경쟁을 피해 3회부터 시간을 늦췄다.
지난 6월 21일 첫 방송한 <가브리엘>은 1회 1.469%(닐슨코리아 기준)로 시작해 꾸준히 시청률이 하락하더니 지난 19일 5회는 0.897%를 기록했다. '무한도전 성공신화'의 장본인인 김태호 PD에게 대체 왜 이런 시련이 찾아 온 걸까.
0%대 시청률 기록한 '김태호 예능'
<가브리엘>은 '무도 팬'이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2011년 방영된 '<무한도전> - 타인의 삶' 편의 확장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출연자가 72시간 동안 해외에서 전혀 다른 타인의 삶을 살아 본다는 콘셉트다. 13년 전 박명수는 의사, 정준하는 야구선수의 삶을 체험했다. '타인의 삶'이 단편이라면 <가브리엘>은 돈 들인 블록버스터 장편인 셈이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당시 '타인의 삶'은 의사와 야구선수가 된 박명수와 정준하의 적응기 외에도, 꽤 긴 분량을 두 사람과 처지를 맞바꾼 '타인'들과의 게임에 할애했다. 즉 정통 예능과 같은 웃음의 분량을 스튜디오나 기존 멤버들이 각각 박명수와 정준하가 된 '타인'들을 놀리는 장면들로 뽑아냈다. 의미도 잡고, 재미도 잡는 김태호식 아이디어의 승리였다. 한편으로 '무도' 멤버들 간의 케미가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기에 가능했던 기획이이기도 했다.
<가브리엘>은 양상이 무척 다르다. 블록버스터라고 한 게 과장이 아니다. 박보검은 영국 더블린에서 아카펠라 합창단 단원이 됐고, 박명수는 태국 치앙마이 식당에서 솜땀이란 태국 음식을 만들었고, 엄혜란은 중국 충칭의 거대 훠거 타운의 식당 매니저가 됐다.
짧은 직업 체험이란 아이디어에 해외라는 볼거리가 더해졌고, 일명 '가브리엘'이라 불리는 타인들의 가족, 친구 등 관계망이 확장됐다. 이런 추가 요소는 섭외부터 진행, 제작비까지 모두 제작진의 수고로움으로 작용할 터.
"(3일을)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나에겐 이게 또 다른 삶의 여행인 것 같았고 그래서 좀 재밌었다"는 박보검의 말처럼, <가브리엘>은 여행 같으면서도 좀 더 깊은 타인 체험으로서의 예능을 표방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핵심은 "타인의 삶인지, 박보검의 삶인지 경계가 조금 애매하다"는 박보검의 고민에 담겨 있었다. 이 주제와 핵심을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납득시키고 공감시키는가 말이다.
실제와 연기, 그리고 '가장' 사이
'타인의 삶'과 확 달라진 형식 중 하나는 스튜디오 토크가 포함됐다는 것. 요즘 많은 예능들이 도입한, 대세와 같은 형식이다. 출연자들까지 토크에 동참한다. 그래서 더 자꾸 몰입을 방해한다. 출연자들이 자신들이 겪은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실제 겪은 감동을 털어 놓는데, 형식과 영상이 썩 조화롭지 못하다. 왜 그럴까.
"연기를 해야 하잖아. 갑자기 몰입이 돼요?"
<가브리엘> 진행자들이 출연자들에게 건넨 질문이다. 여기에 답이 있다. 출연자들은 연기를 해야 한다. 박보검처럼 음악과 친근했던 이력의 소유자도 일단 타인인 '척' 해야 한다. 일종의 '가장'(假將) 놀이인데, 출연자들은 방송을 위해서든 자연스러운 조화든 도입부의 '가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문제는 '타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다. 한국 방송을 위해, 한국에서 날아온 유명인 출연자들을 위해 이들이 행하는 '가장'이자 '연기'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어쩔 수 없다. '타인의 삶'이란 형식 자체가 지극히 방송스러운, 방송인 걸 인지하지 않는다면 애초 불가능한 판타지 아닌가.
진행자인 데프콘과 다비치 강민경·이해리가 입을 모아 "저분들 재연배우 아니에요?"라며 신기함과 어색함을 동반하는 반응을 나타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애초 설정 자체가 출연진들조차 반신반의 할 정도로 과하기에 방송 카메라를 의식하는 일반 외국인들의 리액션이 돌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인의 삶'은 그걸 <무한도전>식 예능으로 돌파해 냈다. 박명수가 의사들과 환자 앞에서 짖궂게 까불어도, 정준하가 야구선수들 앞에서 구박을 받아도, 이 둘과 자리를 맞바꾼 의사와 야구선수가 박명수와 정준하의 캐릭터를 연기해도, 전부 예능의 웃음 요소일 뿐이었다.
이걸 정극이자 장편으로 발전시킨 <가브리엘>은 방송시간도, 스튜디오 토크도, 무엇보다 설정 자체도 너른 공감을 이끌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행 프로그램인지 헷갈린다는 칭찬이 마냥 칭찬이 아닌 셈이다.
'김태호 예능'은 왜 계속 부유하는가
자꾸 여행을 간다. <먹보와 털보>의 노홍철과 비도, <서울 체크인>·<캐나다 체크인>의 이효리도 집 나와서 고생을 했고, <지구마불 세계여행> 시리즈는 아예 여행 크리에이터들을 모았다. <놀면 뭐하니?>에서 나온 이효리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댄스가수 유랑단>이 예외적일 정도였다.
여행 포맷엔 볼거리, 서사, 일반인들의 출연, 감동 또는 주제 의식 등이 담기기 마련이다. 이 모두를 <무한도전>은 매번 다른 특집으로 뒤섞고 변주해왔다. <가브리엘>은 분명 이들의 총합과도 같은 블록버스터였다. 안타까운 건 <댄스가수 유랑단> 이후 추락하는 시청률일 뿐.
'김태호 예능'의 시청률은 왜 계속 부유하는가. 제작자로서의 부담감이나 다변화된 플랫폼은 차치하자. 이미 비교당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나영석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김태호 PD도 플랫폼 실험을 계속해 왔다. <놀면 뭐하니?> 시절부터 라이브방송 등으로 유튜브와의 친밀도를 높여왔고, 넷플릭스와도 작업했다.
문제는 감성이다. 몰아보기와 숏폼을 대세로 받아들이는 세대와 김태호 PD와의 접점 말이다. '본방사수'를 지켜줬던 그때 그 시청자들은 예능 한 편의 '서사'를 탐닉하고 방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준비가 된 세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당탕탕 우여곡절 게임의 끝에 반전을 숨겨 놓거나, 의도하지 못했던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극적인 예능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시대다. 유튜브 몰아보기 영상을 수십만, 수백만이 보는 시대다.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도 힌트가 제시됐듯,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쳐나고, 이를 부추기는 플랫폼의 시대에 김태호식 예능은 너무 점잖고, 호흡이 길다. 요즘 인기 있는 진행자인 데프콘이나 깨알 같이 오디오를 채워주는 다비치 강민경·이해리의 스튜디오 토크를 도입해도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나영석과 김태호의 차이
'타인이 삶'이 웃음을 주며 좋은 반응을 얻었던 건 인기 예능 <무한도전>의 박명수와 정준하의 캐릭터를 전 국민이 친숙하게 받아들였다는 점 때문이다. 다수가 그들의 연기에 몰입해 리액션할 기반이 닦여 있었다. 반면 <가브리엘> 속 '타인들'에게 남은 건 카메라에 대한 의식 차이에서 비롯된 어색함의 농도 차, 타국에서 온 출연자와 방송 제작진을 대하는 친절함뿐이다. 주제 의식만 남고 재미가 반감된 꼴이랄까.
나영석 PD가 영리했다. <1박2일> 시절부터 김태호 PD와 비교됐던 나 PD는 일찌감치 케이블과 유튜브를 점령했고, 의미와 주제보다 웃음과 반복, 변주를 택해왔다. 나영석표 예능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으면서 시즌을 거듭했고, 멤버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공간을 산촌에서 어촌으로, 식당을 국내에서 해외로 확장시키며 10년 넘게 시청자들과 호흡해 왔다.
유튜브에서조차 본인이 진행자로 나설만큼 유튜브나 OTT 플랫폼 시청자들과의 친밀도를 넓히고 심리적 간극을 좁혀왔다. 그간의 게스트들만 불러도 유재석급 조회수가 나왔다. MBC를 나온 김태호 PD가 부침을 겪는 기간이 나영석 PD에겐 유튜브에서의 입지를 확립하는 시간이었다.
<가브리엘>의 저조한 시청률은 김태호 PD에게 독이 될까 약이 될까. 확실한 건, 손석희에게 털어 놓은 시청률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지고 길어질 것이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