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다큐 방영 예고한 KBS <독립영화관>, 따져봐야 할 문제들
2017년 3월,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 KBS <독립영화관>에서 방영됐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대개의 독립영화 운명이 그러하듯, 극장에서 채 1만 명이 보지 못한 독립예술영화가 지상파를 통해 방영되는 일은 영화 자체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극장이 적어서 때를 놓쳤거나 독립영화에 관심이 없는 일반 관객들의 접근성이 넓어지는 것이다.
KBS <독립영화관>의 역할이 거기에 있다. 누구는 추상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한국 독립예술영화들의 접근성을 넓히는 것. 2011년 1월 출발한 <독립영화관>이 딱 그랬다. 앞서 2001년 <KBS 단편영화전>이란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이후 2006년 폐지가 결정됐을 때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20여 개 문화예술단체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반발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쉽게 한국독립영화는 두 가지로 나뉜다. <독립영화관>에 방영된 영화와 아닌 영화. 공감하는 영화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해 제작되는 한국 독립영화(장·단편 포함)는 1300~1400편에 달한다(2019년~2023년 영화진흥위원회 2023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 그 중 극장에서 개봉하는 한국 장편 독립영화는 고작 100편을 넘는 수준이다.
이중 <독립영화관>이 1년 52주 동안 방영하는 영화들이 몇 편이나 되겠는가. 특히 <독립영화관>이 주로 방영하는 한국 장편 영화들은 영화진흥위원회가 독립예술 영화로 인정한 작품들이다. 영화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나름 인지도가 있는 작품들이 약 500만 원이란 방영료를 받고 공영방송이란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대중 상업 영화 위주인 명절 특선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접근이란 얘기다.
최근 KBS는 최근 광복절 기획으로 이승만 미화 다큐멘터리 '기적의 시작'을 <독립영화관>에서 방영키로 했다. 일부 독립영화인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유다.
따져 볼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영화와 방송이라는 문화적 접근, 그리고 더 큰 논란을 불러온 역사적 접근.
멀쩡한 <독립영화관> 망가뜨린 KBS 그리고 박민 사장
▲ 박상현 전국언론노동조합 본부 본부장과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박홍섭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제주4.3범국민위원회 이사장, 장현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 기념 단체 연대회의 의장,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김수정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가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국언론노조 본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8.15 광복절을 맞아 가 준비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시작> 방송 편성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저는 이 제작물의 방영을 방송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방송 사고예요. 이게 꼭 공영방송이라서가 아니라 공공재인 전파를 활용하는 방송에서 포르노를 틀면 국민들이 기겁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대한민국 극우 집단들의 사고와 위험한 문제의식을 아주 적나라하게 투영한 역사 왜곡 포르노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박민 사장 체제가 주도해서 방송 사고를 내겠다는 의미입니다."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의 일갈이다.
그는 지난 12일 언론노조 KBS본부, 민족문제연구소, 제주4.3범국민위원회 등의 KBS 의 '기적의 시작' 방송 편성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정부 하에서 공영방송 장악이 추진되면 제2, 제3의 '기적의 시작'이 KBS뿐만 아니라 MBC에서도 그리고 또 다른 공적 소유 구조를 가진 언론에서도 연달아 방영될 것이라는 게 저희 추측"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백번 공감한다. 이미 방송 장악의 전례를 만든 이명박 정부를 보라. KBS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11년 '역사 왜곡' 논란 속에 백선엽 2부작 다큐와 이승만 3부작 다큐 편성을 강행해 반발을 샀다. 그나마 자체 제작물이었다.
그래서 더 심각하다. 굳이 영화계 안팎에서 위상을 검증받고 KBS 내에서도 공영방송으로서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는 <독립영화관>이란 프로그램에 '기적의 시작' 다큐를 편성한 KBS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제38조 제1항 제2호에 의거, 한국독립영화 인정을 위해 '독립·예술영화 인정 등에 관한 소위원회'를 구성, 독립영화 인정 심사를 진행한다. 영화제 수상작 및 상영작 등을 중심으로 자동인정되는 작품이 존재하고, 신청 후 심사를 거쳐야 하는 작품으로 분류된다.
지난 2월 극장 개봉한 이후 2만6천여 명(영진위 통합전산망 기준)을 동원한 <기적의 시작>은 올해 초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인정 소위원회 심사에서 탈락했다. MBC에 따르면, 영진위 심사위원들은 <기적의 시작>에 대해 '영화로 보기 힘들다', '기본도 갖추지 않았다'는 심사평을 내놨다.
언론노조 KBS본부도 '기적의 시작'에 대해 "저예산 다큐 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영화라고 부를 정도의 수준이 되는지 의문이 드는 영상물"이라며 "90년대 재연 방송에서나 나올법한 조악한 내레이션과 자막 폰트, 노래방 화면을 연상시키는 재연 장면까지.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이조차 받지 못했다. 왜 이런 영화를 웃돈을 줘가며 비싸게 구입해 광복절에 방영하려고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평소 <독립영화관>이 방영해 온 독립영화들과 비교해 격이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친일' 나팔수로 전락한 공영방송의 오늘
▲ 다큐 <기적의 시작> 포스터.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KBS 제주방송총국 구성원인 기자협회 제주지회와 PD협회 제주지부, 영상제작인협회 제주 회원, 아나운서협회 제주 회원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4·3을 좌익세력이 주도해 자유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사건으로 규정한 영화를 KBS가 방영하는 건 역사왜곡에 동참하는 것이라며 방영 철회를 사측에 요구했습니다."
다름 아닌 'KBS 제주' 보도다. KBS 제주는 지난 13일 <'기적의 시작' KBS본사 방영 철회 촉구 잇따라> 보도에서 "KBS 본사가 광복절 기획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기적의 시작'을 방영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자 도내에서 반발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라며 위와 같이 전했다. 언론노조 KBS본부에 이어 KBS 제주에서도 직접적으로 방영 철회를 요구한 것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4.3 사건 학살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2003년 정부가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제주4.3 단체들은 물론 KBS 제주까지 나서서 KBS의 '기적의 시작' 방영 철회를 촉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뿐인가. 다수 역사학자들이 '기적의 시작'을 '이승만 미화 영화'로 평가한다는 보도도 여럿이다.
이번 KBS의 '기적의 시작' 방영은 박민 사장 체제의 KBS가 공영방송이 아닌 '윤석열 방송'이자 '친일 방송'으로 전락했음을 자인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7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역사 퇴행을 우려하는 글을 쓰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오호통재(嗚呼痛哉)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