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7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져서,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섬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신기한 건, 일본이 3위, 우리나라가 4위이다. 아시아에 섬 많은 나라들이 다 몰려있다.
필리핀 보홀에서 패키지 투어에 배정되는 숙소는 거의 팡라오섬의 알로나비치 근처에 있다.
첫날, 늦은 시간에 보홀-팡라오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 후 리조트에서 푹 쉬었다.
아침에 꼬끼오~하는 닭 울음소리에 느지막이 일어났다. 아침햇살에 잠을 깨고 싶어서 암막커튼을 걷고 테라스에 나가니 마당에 나와있던 현지인 필리피노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다시 커튼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리조트에서 수영장 옆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간다.
"Room number? (방 번호는요?)"
"204."
조식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 번호 확인 후 바로 식당으로 들어가서 조식을 먹었다.
아침은 와플, 핫케이크와 커피 위주로 가볍게 먹고 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육상투어를 하러 나섰다.
비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을 고려한 건지 육상투어는 늦은 아침에 출발해서 아침잠이 많은 나도 부담 없이 챙겨서 나갈 수 있었다. 육상투어를 빠지는 팀들이 많이 있어서 어제 공항에서 탔던 버스보다 훨씬 작은 미니버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버스에 오르니 한쪽은 두 개의 좌석이 줄지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한 좌석씩 총 4줄 정도 있었다. 그리고 맨 뒷칸은 좌석 4개가 연달아 있는 구조였다. 내가 묵었던 솔레아 리조트는 가장 외딴곳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먼저 타게 되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나오고 있어서 습도 없이 쾌적한 공기였다. 남편과 나는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다른 리조트에서 나머지 일행들을 태웠다. 어젯밤, 공항에서 보고 두 번째 보는 얼굴들이어서 괜스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분들은 조식이 입맛에 안 맞았고, 룸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겉으로는 우리 숙소보다도 더 좋은 리조트였는데 실제 투숙하는 사람들의 만족도는 떨어지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점심은 로복강에서 선상뷔페를 먹는다. 점심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로복강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은 수상가옥처럼 강 위에 대나무를 꽂아놓고 그 위에 나무로 길과 건물을 지은 것 같았다. 대기하는 장소는 의자가 꽉 차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선착장으로 나가는 쪽에 선풍기 몇 대를 놓았지만, 앞쪽에만 바람이 갈 정도로 좁은 공간에 사람들로 꽉 차서 답답하고 후덥지근했다. 몸 전체가 오렌지색 에너지처럼 활활 열기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우리가 유람선을 탈 차례가 되었다. 유람선을 타러 가는 길도 이색적이었다. 정글로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열대우림에서 자랄 것 같은 나무를 제치고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 위에는 테이블들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있었다. 이렇게 강 위에서 배를 타고 경치를 구경하면서 점심을 먹는다니! 식사 따로, 관광 따로가 아닌 식사와 관광이 합쳐진 콤보메뉴 같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할 때 호화로운 배를 타고 왔다고 한다. 그 배에서 포도와 과일들의 향연이 벌어졌겠지. 마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된 것처럼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음식을 먹으니 호사스러웠다.
최대한 강과 가까운 안쪽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선상뷔페에서 내가 중점을 뒀던 건 먹는 것보다는 로복강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한 테이블 전체에 같은 여행사에서 패키지여행을 함께 온 일행이 같이 앉았다. 현지인 가이드들과 담당 한국인 가이드는 우리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크루즈가 출발하면서부터 뷔페를 먹을 수 있었다. 크루즈에 탄 정원에 비해서 음식이 차려진 공간이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에 처음에 뷔페 쪽에 가서 빨리 음식을 담아 올수록 좋다. 나는 빨리 먹고, 빨리 경치를 감상하고 싶어서 빨리 음식을 담기 시작한 편이었다. 음식을 덜고 있었는데, 한 뷔페음식 지점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직원이 오더니 우리 일행에게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한다고 했다. 이미 우리는 4~5개 정도의 음식을 덜은 상태였는데,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한국인 가이드에게 "이 방향이 맞아요?"라고 물었을 때, 그 한국인 가이드는 맞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우물쭈물 대고 있으니 크루즈 직원이 다시 다가와서 우리 방향이 잘못됐다고 말해줬다.
그때쯤 돼서는 크루즈에 탄 모두가 음식을 덜러 와서 줄을 서고 있었기 때문에 테이블에 돌아와서 처음에 덜어왔던 음식을 먹었다. 덜어온 음식을 조금 먹고 초록색 강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빠졌을 때 다시 음식을 가지러 갔다. 동남아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과일이다. 노란색 바나나와 빨간색 수박을 덜었다. 바나나의 노란 껍질을 까니 속살도 노란색이었다. 수박은 조금 심심한 맛이었는데, 많이 달지 않고 심심한 맛이 좋았다. 한국에서 먹던 바나나와 수박과는 한끝이 다른 맛이었다.
크루즈가 초록색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파란색을 푸른색으로 표현하는 그런 초록색이 아니다. 강물 색깔이 나뭇잎 색깔인 초록색이었다. 열대우림에서 볼법한 뾰족하고 큰 잎을 가진 나무들이 늘어서있다. 날씬하고 큰 키를 지닌 야자수는 모히칸 스타일로 머리를 자른 것처럼 윗부분만 풍성한 이파리가 나 있었다. 초록색 이파리와 초록색 강물. 아마존 한가운데 온 것 같았다. 흐린 잿빛하늘은 로복강의 초록색을 더 돋보이게 해 줬다.
-둥두두두. 둥둥둥두두두
멀리서 북소리. 나무와 가죽, 그리고 나무와 나무가 맞닿는 소리가 난다.
크루즈가 원주민이 사는 곳에 멈췄다. 필리핀은 원래 원주민이 사는 나라였다. 하지만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면서 점점 스페인과의 혼혈이 늘어났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혼혈이고 원주민은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이 땅을 지켜왔던 필리핀 원주민. 지프라기 같은 것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구릿빛 상채는 내놓은 상태였다. 원주민들은 나무막대를 바닥에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고 있었다. 빠른 템포의 소리는 호전심을 고취시켜서 전사의 사기를 북돋는 듯했다. 한 늙은 전사의 눈빛은 먹잇감을 바라보고 쫒는 독수리처럼 매섭고 강인했다. 내 머릿속에서 이미 그분은 '추장님'이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사진을 찍고, 팁통에 팁을 줬다. 사진이 잘 나오게 불덩이를 나오게 해주기도 하고, 전사처럼 화살의 시위를 당기는 포즈를 취하는 것도 도와줬다. 나는 함께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이 장면을 각인해 놓았다. 내적인 친밀감으로 이미 악수까지 하고 있었다.
크루즈는 유턴해서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듯 흐렸던 하늘이 어느새 파랗게 개고 있었다. 뭉게구름은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 선명한 채도를 보였던 초록색 강물은 선명하고 파란 하늘 아래 탁한 초록색으로 보였다.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탁한 에메랄드빛. 하지만 그 속에 오묘한 일렁거림이 있었다.
크루즈에는 한 밴드가 계속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한국 노래들을 많이 불러줬다. 영화 <클래식>의 주제곡인 <너에게 난 나에게 넌> 노래도 나왔다. 이 노래를 듣는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게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주던 햇살이 되고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