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온다. 집에 있으면 이중창 때문에 비 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아침부터 창문에 빗물이 때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리는 걸 보니 제법 비가 많이 오나 보다.
비가 오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만은 비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확인하면서 비가 안 오기를 바랐는데 결국 온다.
남편과 짐을 간단하게 챙겨서 서울을 가려고 했는데, 우산을 챙겨가야 한다는 것과 사람 많고 복잡한 거리를 우산을 쓰고 가야 한다는 게 내키진 않는다.
입으려고 했던 베이지색 코트 대신 더 칙칙한 회색 코트로 바꿨다.
우산을 넣는 자리만큼 책 한 권을 빼서 공간을 비웠다.
차를 가져가지 않을 거기 때문에 배낭 하나에 잠을 최대한 간략하게 챙기기로 했다.
남편과 차를 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정류장 근처에 주차를 한 후, 버스를 타고 기차역까지 가서 ktx를 탈 생각이다. 조수석에서 내다보니 창문 밖으로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장화를 신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는 아니고 이슬비처럼 살짝 내리는 듯하다. 자동차 유리창에 빗물이 안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때쯤 다시 밖을 보니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우산을 접기 시작한다.
"비가 멈춰서 다행이에요."
가방에 각각 넣은 3단 우산을 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버스를 기다렸다가 남편과 버스를 탔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좌석이 눈에 보여서 맨 뒤에 앉았다. 맨 뒤에 앉아서 함께 여행의 설렘을 느끼며 셀카도 찍고, 수증기가 낀 창문에 손가락으로 하트도 그려본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기차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대기하는 의자에서 나란히 앉아있다가 시간 맞춰서 ktx를 타러 갔다. 예매를 빨리 하지 않아서 마주 보며 가는 좌석이다. 남편과 얘기하는 대신 서로 노트북과 태블릿피씨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나란히 앉아있지만, 서로 대화를 안 하니 모르는 사이인 척 함께 기차를 타는 것 같다.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장면처럼 기차에서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한다. ktx는 너무 빠르다. 조금 더 길게 남편과 앉아있고 싶은데 함께 기차여행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 버스도 짧게 탔는데 기차도 짧다. 다음에는 무궁화호를 타고 천천히 우리나라 끝까지 함께 기차를 타고 가고 싶다.
기차 밖으로 풍경들이 지나간다. 비는 오지 않는다. 잠시 눈을 감은 것 같은 데 벌써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공기가 매우 차갑다. 봄이 오려나 했는데 아직 멀었다는 듯 사나운 바람이 몰아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뒤에 줄을 선다. 우리가 가장 끝이다.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버스를 타러 서울역을 나간다.
서울에 오니 사람도 많고 활발한 기운에 나도 신이 난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한다.
"저번에 서울역 왔을 때는, 난임 때문에 힘들어할 때였잖아. 지금은 이렇게 어엿하게 임신해서 왔네."
나는 '어엿하다'는 말이 너무 재밌어서 한참을 웃는다.
"어엿하게요?"
남편은 가끔 잘 안 쓰는 말을 써서 날 웃기게 한다. 너무 신나서 남편이 뭐라고 말해도 다 재미있다.
난임 때문에 너무 힘들어할 때, 남편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도 그때마다 항상 재미있었지만, 아무래도 임신실패 여행보다는 임신성공 여행이 더 재밌다. 사실은 힘들었던 그 순간들이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묵직한 함박눈이 내리면서 비가 된다.
난임으로 슬퍼했던 적이 분명 있었는데, 눈이 덮이듯 행복한 기억으로 다 덮여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밤에 울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서울에 오니 이런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눈은 더 이상 안 올 줄 알았는데 비대신 내리는 눈은 아름답기만 했다. 눈송이가 하도 커서 우박같이 펑펑 떨어졌다. 우산을 쓰고 버스를 타러 걸어간다. 새끼오리가 어미오리를 따라가듯 남편의 뒤를 졸졸졸 따라간다.
-철퍽철퍽
쏟아지는 눈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다 녹는다. 3단 우산으로는 남편의 몸을 가리기 부족했는지 카키색 패딩이 진하게 젖어들어간다.
"우산 챙기긴 잘했다."라고 말하며 웃는다.
사람들과 차들 사이에서 환상적으로 내리는 흰 눈은 익숙지 않은 광경이다. 이 풍경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건 내 앞에서 걷고 있는 남편의 든든한 등이다.
버스도 많고, 정류장도 많아서 뭘 타야 할지 복잡하지만 남편을 따라서 한 버스를 탔다. 남편은 나를 임산부석으로 안내하고 앉으라고 하고 옆에 서 있다. 버스에 자리가 많아서 앉으라고 했더니 한사코 괜찮다고 한다. 이젠 제법 배가 나왔지만, 서울에서는 대중교통에 앉을자리가 없을까 봐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왔다.
목적지에서 내린다. 여전히 내리는 눈 속에서 연회색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남편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 남편은 날 바라보며 자세를 취해준다.
"사진 찍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알지."
내가 좋아하는 남편의 웃음이 흩날리는 눈을 배경으로 눈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폴바셋에서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포가토를 먹는다. 남편이 폴바셋은 라테가 맛있다고 추천해 줬는데, 키오스크에서 아이스크림을 보는 순간 눈 오는 날엔 눈을 닮은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메뉴가 먹고 싶어 졌다. 아이스크림라테와 아포가토 중에서 고민하다가 아포가토를 시켰다.
눈 오는 날 2층 창가자리에서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좋다. 따뜻한 카페 내부 온도와 재즈음악을 들으니 추운 겨울날 산장의 벽난로 앞에 앉아서 타닥타닥 타는 장작소리를 듣는 것 같다. 쉬지 않고 쏟아내리는 눈처럼 태동도 쉴 새 없이 계속된다.
남편한테 카톡으로 사진이 잔뜩 온다. 받아보니 다 내 사진이다. 내가 남편을 찍고 있을 때 남편도 나를 찍고 있었다. 임산복으로 라인이 들어가지 않고 케이프처럼 펴지는 스타일의 코트를 입었는데 제법 배가 나온 게 태가 난다. 추운 날씨가 지나면 우리 아이가 태어난다. 남편 그리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하는 서울여행이 행복하다.
아늑한 호텔에서 뒹굴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어디 가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지금 이렇게 호텔에서 쉬면서 근처 카페에 가는 게 좋다고 말한다. 내가 뮤지컬이나 공연 보는 걸 좋아하는 걸 기억하는 남편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홀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체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험심에 시험하고 싶지 않았다.
"태동이 하루종일 있는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
처음엔 우리 아이도 신이 나서 계속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긴장해서 그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보통 낮에 활동할 땐 태동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자기 전 누웠을 때 태동을 느꼈었다.
어쩌면 하루 만에 우리 아이가 뱃속에서 쑥쑥 자라서 계속해서 태동으로 "나 이만큼 자랐어요."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2박 3일간 호텔에 머물면서 창 밖을 바라보고, 호텔 근처 맛집들과 카페를 돌아다니고 멀리는 가지 않으며 푹 쉬며 보냈다. 다른 장소지만 동네에서 하던 행동을 했다. 일상이면서도 일탈이었다. 내가 느끼는 이 편안함 속에서의 설렘이 아이에게도 즐거운 자극이 되었길 바란다. 이렇게 나의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태교 여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여행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