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호숫가 둑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한가로이 거닐던 그날.
둑에 세워진 초록색 철망을 타고 올라가던 나팔꽃을 보고 놀라던 날.
그렇다고 갑자기 나팔을 불어 대어 놀란 것이 아닌.
조용하게 있는 여린 나팔꽃 덩굴손을 보고.
어디로 손을 뻗칠지 모르는 듯한 덩굴손이 하늘을 향해 하늘대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끝을 철망의 바로 위 셋째 칸에 살며시 얹어 주었다.
그러고는 잠깐 호수에 비치는 산 그림자를 감상하였다.
잠깐 사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덩굴손으로 눈이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히 셋째 칸에 얹어 둔 덩굴손 끝이 돌고 돌아 둘째 칸에 올라 있었다.
잘못 보았겠지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았으나 분명했다.
손에 든 커피 컵을 보아도 분명 한두 모금 정도 마실 시간이었다.
잘 못 얹어 놓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 덩굴손의 끝을 같은 칸의 왼편으로 옮겨두고 다시 관찰하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둑을 몇 걸음 걸어갔다 되돌아왔다. 잔뜩 호기심이 부풀은 나는 조심스럽게 철망으로 다가갔다.
과연 이번에도 돌아 올라갔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건 다윈의 진화설 이상 가는 발견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되었다. 그 사이 덩굴손은 돌고 돌아 왼쪽 첫째 칸으로 올라타고 있었다. 만약에 현미경이 있었다면 그 손이 늘어나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터였다. 아니 내가 보고 있는 이건 분명 움직이고 있는 동물이었다. 식물을 가장한 동물. 물론 아프리카 지역에는 곤충이 나타나면 잎을 오므려서 잡아먹는 식충식물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내 눈 앞에서 그런 현상을 볼 줄이야. 나는 급히 커피를 마셔버렸다.
식물과 동물을 구분하는 요소가 무엇인가. 엽록소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즉, 햇볕과 물과 공기를 가지고 스스로 먹고 살 영양분을 만들 줄 아는 엽록소를 가진 것이 식물이라면 동물은 스스로 먹고 살 그런 기능이 없어 다른 식물이나 동물을 취해야 살 수 있는 생물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식물이야 말고 독립생물이고 동물은 남에게 붙어서 살 수밖에 없는 기생 생물인 것이다.
우리집 식탁위 꽃병에 몬스테라 가지 하나가 꽂혀있다.
큰 가지에서 하나를 뚝 잘라 물에 담가놓은 것이다. 그런데 잘 자라고 있다. 거기서 뿌리까지 내리면서.
어디 동물의 다리 하나를 뚝 잘라 모셔서 잘 자라고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물론 잘라진 다리를 잘 이어 붙이는 경우는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식물의 생명력, 자생력은 동물이 못 따라 갈 듯싶다.
사막의 한가운데서도 버텨내는 식물을 보면 더욱 그렇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면 돌돌 뭉쳐 있어 바람이 불면 굴러다닌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빗방울의 기미가 있으면 바로 잎을 펼쳐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그런 모습을 누가 그저 한군데 가만히 있는 식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뿌리가 땅 위로 길게 뻗어 나와 상황에 따라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나무도 있지 않은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주장하는 것도 무엇인가. 식물의 현명함이다. 벼나 보리가 왜 이렇게 오래 지구상에 남아있을 수 있는가. 바로 동물의 먹잇감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닌가. 동물은 자신의 식량을 위해 벼나 보리 씨를 잘 간수했다가 다음 해에 열심히 다시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번식하고 종족이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결국 동물을 움직이는 것은 식물인 것이다. 시골 우리 텃밭에 심은 가지가 그렇다. 작은 씨앗 몇 개를 뿌려 놓으면 ‘무’만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 그렇게 몇 배의 열매를 가져다주니 그 씨앗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요사이 유튜브의 원리와도 유사하다. 맛있는 먹잇감을 많이 주는 콘텐츠가 널리 퍼져가고 조회 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미국의 세쿼이어 국립공원에 가면 2천 년이 넘은 나무가 수두룩하다. 그 나무 둥지 밑으로 차가 지나간다. 그만큼 오래 산다. 예수가 나기 이전이니 BC라는 용어도 여기서는 BS라고 표기해야 할까. Before Sequoia. 백 년도 사니 못 사니 하는인간이라는 동물에 비하면 얼마나 식물이 대단한가.
그러고 보면 숨만 쉬고 누워있는 사람을 식물인간이라는 하는 표현은 식물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언어일 수 있
겠다. 식물이야말로 싱싱한 ‘싱’물이요 동물은 그저 여기저기 해나 끼치는 ‘독’물(毒物)일 수도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덩굴손처럼 야들야들하며 하늘대는 식물이고 싶다. 고요함 속에 움직임을 숨겨놓은 정중동. 손은 늘 빈손으로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쉼없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살찌우고 있는 그런 꽃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