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가 사라진 이유

너와 나의 거리

by 걸침

무대, 암전 상태에서 음악이 흐른다.

주인공 사이가 무대 앞으로 나오면 핀 라이트. 독백으로 시작된다.


사이: 내 이름은 사이입니다. 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빠 일준이 태어나고 언니 이순이가 태어날 때까지 난 세상에 없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보이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아주 좁은 사이, 아니 좋은 사이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아빠 엄마는 가끔 그때를 그리워하곤 한답니다. 둘이서 항상 붙어 다니고 고운 말들이 사뿐사뿐 날아다니고... 자식을 많이 낳는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답니다. 둘의 사이를 보고 주위에서 시샘을 할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둘째 이순 언니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아빠의 회사가 문제가 생기면서 퇴근이 늦어지고 술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말이 많아지고 엄마의 잔소리가 많아지고, 많은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니 좋은 것일지 모르지요. 제가 태어났으니까요. 제가 세상의 빛을 보면서 소파 양쪽 끝에 앉아있는 엄마 아빠 사이엔 잡초 무늬가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같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둘의 사이엔 스마트폰이 벽으로 자고 아빠 엄마 둘은 노인의 이빨 사이만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침묵을 깨는 대화 사이에 서로가 자르고 잘린 말들의 시체가 떠다녔습니다. 서로 잡았다 놓친 말꼬리들이 두엄을 이루었습니다.


사이는 무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의자에 앉는다.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이내 독백을 계속한다.


사이: 저녁 먹었냐는 엄마의 물음과 먹었다는 아빠의 헛 대답 사이에 할머니가 지나갔습니다. 할머니에겐 세 번을 먹었다고 해도 결국 밥상은 차려지곤 했었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보지 못하는 광경입니다. 가끔씩, 알아서 하라는 엄마의 말과 하기만 해봐라는 속마음 사이에서 아빠는 하얗게 길을 잃었습니다. 마음의 뿌리에서 말의 꽃이 피는 순간 해가 낯선 꽃은 뿌리의 기억을 잊습니다. 마음은 동쪽에 있는데 말은 서쪽으로 갑니다. 꽃과 뿌리 사이가 행성만큼 멀어집니다.


무대 상수 오른쪽 벤치에 노부부가 앉아있다. 스포트라이트 비춘다.


사이: 저기 노부부가 벤치에 기대, 노을을 덮고 있습니다. 둘 사이는 아무 말이 없어도 위아래 층간처럼 서로의 소음을 듣고 있습니다. 아니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저도 예전 오빠 언니 낳을 때의 엄마 아빠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렇게 둘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말이죠. 그러려면 제가 없어져야겠죠. 부모 앞에 먼저 가는 자식은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런데요. 이상하게 만약 제가 먼저 가면 대못이 아니라 대박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이상한 자식이지요. 제가 없어지는 건 서운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행복해진다면 저는 과감히 저를 포기할 용의가 있어요. 제가 서운하지 않냐고요? 무섭지 않냐고요? 아니요. 전혀.....


앉아있던 사이가 일어나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사이: 저는 무섭지 않아요. 저는 죽어도 죽지 않거든요. 무슨 말이냐고요? 지난 2022년 노벨 물리학상이 발표되었지요. 바로 양자얽힘에 대한 신비를 밝힌 공로지요. 양자얽힘이 뭐냐구요? 좀 어렵긴 하지요. 서로 얽힌 입자 쌍중 한 입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입자가 설령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입자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이론이죠. 천재 아인슈타인의 가설을 뒤집는 거예요.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에서 후자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 할까요? 그러니까 저와 같은 이름의 사이,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 아빠에게 있었던 보이지 않는 사이와 제가 한 쌍으로 얽혀있다고 보면, 저의 죽음은 먼저 사이의 행동을 결정짓게 되겠지요. 그러니 제가 그 언니 사이를 만나 동무하면서 말해줄 거예요. 나 같은 동생 사이가 태어나지 않도록 언니 사이가 아빠 엄마 사이를 잘 보살피도록 말이죠. 결국 저는 죽어도 언니 사이와 같이 살며 엄마 아빠를 끝까지 돌봐드리는 거예요. 저 벤치에 앉은 노부부처럼 말예요. 어때요. 이만하면 효녀 아닌가요? (사이) 예, 고마워

요. 말씀만으로도요. 자. 시간이 없네요.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죽으러. 아니 언니한테로. 가서 사이좋게 놀 거예요. 우리 사이 좋은 사이......


무대에서 사이 뒤돌아 나간다. 나가면서 손으로 빠이빠이 한다. 조명 페이드아웃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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