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 영화를 봤더라면

-사랑은 밀고 당기기

by 걸침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남자는 기차여행에서 우연히 한 여인과 동석하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마음에 끌렸다. 그러나 남자는 다음 역에 내려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남자는 상대 여자가 비록 내게 호감을 갖고 있지만 잠깐의 만남 때문에 다음 역에서 따라 내리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같이 내리자고 권유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을 꺼낸다. “그래요. 당신은 이렇게 낯선 남자와 함께 그것도 목적지도 아닌 곳에 내리는 것이 내키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만약 당신이 나중에 결혼해서 살다가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게 된다면 말이에요. 오늘 기차에서 내린 경험이 큰 추억이 될 것입니다. 만약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고, 반대의 남자라면 ‘그때 그 사람에 비하면 내 남편이 훨씬 낫지’하고 권태기를 잘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설득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생각대로 갔을 경우의 시나리오를 그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맡기고 결정은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다. 내 풋사랑의 장면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한 번은 옆자리에 앉은 여대생에게 그런 시나리오를 그려주지 못해서 실패하고 한 번은 억지로 내리자고 해서 실패를 했다.


영화 사랑의 레시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여주인공 게이트는 갑작스레 엄마를 잃은 조카 조이를 맡게 된다. 일류 요리사인 게이트는 최고의 프랑스 요리로 조이의 관심을 사려 하지만 조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를 본 부주방장인 닉은 조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게 평범한 스파게티를 만들어 조이 옆에서 먹는다. 엄마의 요리가 그리웠던 조이는 그 스파게티가 먹고 싶었지만 내색을 하지 못했다. 닉은 조이에게 스파게티 한 접시를 쥐여주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니 들고만 있고 절대 먹지 말라고 한다.


결국 조이는 참지 못하고 한 접시를 금세 먹어 치웠다. 닉은 알고 있었다. 먹으라고 권하는 것보다 스스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조이를 위한 요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상처받은 어린이들이 가진 지나친 친절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트너를 구해 오는 게임을 한답시고 뒷집 여학생에게 무작정 들이댔다가 박대를 받았던 기억이 겹쳐진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어느 주에 밀주업자의 아들과 세관원의 딸이 사귀었다. 둘은 서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도 약속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하면 여자의 대답은 늘 ‘NO’였다. 하루는 남자가 집에 있는 밀주를 잔뜩 마시고 취해서 여자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여자의 손을 끌고 미리 얘기해 둔 목사님에게로 가서 결혼식을 올려달라고 했다. 결혼식 후 남자는 여자에게 물었다. 'NO, NO’하더니 어떻게 이렇게 순순히 따라왔냐고.


여자의 말이 걸작이다. 자기가 말한 ‘NO’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라 ‘no idea’ 란 뜻이었다고. 그것이 ‘It’s up to you, 자기 맘대로 해‘ 란 뜻이었다는 것을 남자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학교 서클에서 한참이나 눈여겨보고 서로의 마음이 끌렸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을 못했던 적이 생각난다. 그때 그 ‘NO’라는 제스처가 별 뜻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유머가 있지 않은가.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고백하니 여자는 ‘말 두 마리와 소 다섯 마리를 가져오면’ 승낙하겠다고 했다. 가난한 남자는 그것들을 장만하느라 젊음을 바쳤다. 세월이 흘러 남자는 여자가 얘기한 것을 장만하여 찾아갔다. 그런데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말 뜻은 ‘두 말 말고 오소’ 였다는 것.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아도 문제가 있는 법이다. 때론 과감한 것도 약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사랑이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상대를 만나기 전엔 어떻게 하면 끌어당길까 하는 +와 -의 인력이 작용하지만 일단 가까워지면 + + 혹은 - - 의 자석으로 서로를 밀어내게 된다. 부부간의 관계가 그렇고 엄마와 딸의 애증이 그렇다. 너무 가까워지면 너무 편해지고 무심하게 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면역이 되어 가는 것이다.


또는 지나친 집착이나 소유욕으로 상대의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거나 가두려 한다. 아내와 세계 캠핑여행을 하다 보면 사소한 것으로 인해 다툴 때가 종종 있다. 한 군데라도 더 가보려는 남자와 일찌감치 숙소를 잡아야 마음 편한 여자와 그 생각의 차이는 조그맣지만 클 수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딪치면 저절로 큰 소리가 나게 되고 상대는 그것을 자기에게 하는 질책으로 알고 감정이 상한다.


반찬 하나라도 더 해 나르려는 엄마와 먼저 반찬도 버리고 있다고 손사래 치는 딸과의 싸움도 그렇다. 그것을 섭섭해하는 엄마와 그런 것 가지고 섭섭해한다고 맞서는 딸. 사랑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일까.


상대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상대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도, 상대가 결정을 못 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도 모두 필요하다. 그리고 상대가 가까이 있을 때는 거리 조정이 필수일 것이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불가근불가원이라 했거늘.


그래야 서로 어렵게 얻은 사랑에 상처를 주지 않은 성숙된 사랑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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