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이 된 다음

by 걸침

아침의 부엌은 뽀송뽀송하다.

창문 너머로 오월의 햇살이 연녹색 나뭇잎 사이를 힘들게 뚫고 내려와 앉는다. 부챗살 같은 빛까지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침 준비는 으레 내 차지이니 익숙한 동선이 나를 이끈다. 무대의 몸짓이 동선을 따르듯이. 양파껍질을 벗긴다. 어떤 기억이 껍질처럼 벗겨진다. 그때의 무대도 부엌이었다. 그녀가 아침을 준비하다가 창문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싱싱했다. 밖에는 우유배달부가 왔다 가고 신문이 던져지고. 그녀는 학교 가는 딸을 큰 소리로 깨우고. 그녀의 목소리는 바빴지만 따뜻했다.

그런 그녀가 죽었다. 아니 연극에서. 저승사자에게 억지로 부탁하여 일생 중에 딱 하루만 가게 해달라고 한 날. 그날이 그날 아침 장면이었다. 딸은 무어라고 엄마한테 얘기하려 했지만 엄마는 바쁘니 나중에 하자고 뒤로 미루는 장면. 다시 돌아와 그 장면을 보는 딸은 엄마가 그때 왜 그리 바빴을까 하는 아쉬움. 연극 우리 읍내의 한 대목이다. 대학 연극반 때 올린 작품이다. 왜 우린 오늘을 아무 생각 없이 다음에게 양보하며 사는 걸까. 다음의 오늘엔 다시 그다음이 자리 잡을 텐데.

양파를 벗긴다. 어머니가 생각난다는 야채. 느닷없이 눈물을 만들어 내는 레시피다. 눈물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기억이 흘러나온다. 그녀를 좋아했다. 창문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깊은 바다처럼 그윽했다. 우리는 잠깐씩 만났으나 서로 내일의 준비에 바빴다. 오늘의 낭만은 내일의 한 끼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어록에 충실했다. 다음에 보자는 말이 일상이 되어갔다. 다음에. 그리고 그다음은 정말 다음이 되었다.


“스물한 살에 몇 가지 결정을 하면 눈 깜짝할 새 일흔이죠” 그때 연극에서 나온 대사였다. 스물한 살은 일흔이란 숫자를 계산하지 못한다. 그땐 그랬다. 그렇게 까마득했다. 그런데 일흔이 되면 스물한 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을 살 일이다.


양파를 데치고 나서 고기를 다진다. 근육이 두툼하다. 내 추억의 근육은 어느 만큼 단단할까. 그때 우리의 다짐이 이만큼 단단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대신에 다짐을 했었으면.


아침준비가 끝났다. 햇살이 그새 다음 자리로 바꿔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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