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브리옹 Jun 04. 2022

[19c후 러시아 사실주의] 진심이 닿는 거리

A.A 이바노프 <예수 앞의 막달라 마리아>

<예수 앞의 막다라 마리아>

['17년 러시아 국립미술관 후기]


  돌이켜보건대, 수 년에 걸쳐 참 좋은 미술관에 많이 다녔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터키, 심지어 모로코 까지도... 그 나라들의 모든 미술관을 가지는 못했지만, 나름 유명하다는 미술관들을 찾아 열심히도 다녔네요.
 


  처음 해외여행을 떠날 때는 그저 유명한 곳이라는 이유로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며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면 깨닫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렇게 글로 써내려 가다보니 어느덧 꽤나 많은 작품들에 대해 음미해보고 감상문까지 쓰게 됐네요. 글로 옮기지 못한 수 많은 작품들도 언젠가는 되새기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수 많았던 해외여행의 끝자락에 들른 러시아 국립미술관은 유럽 최고의 미술관들과 비교해서 최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오히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러시아 에르미티쥬 보다 좋았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에르미타쥬 본관만 갑니다. 하지만 에르미타쥬는 왕가의 취향에 따라 작품이 수집된 곳이기에 서유럽 명작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지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이미 유럽의 최고의 미술관들은 거의 다 가봤기에 러시아인의 영혼이 담긴 국립미술관이 오히려 더 기대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원래부터 예술 강국입니다. 러시아 정교회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했지요. 러시아 자체 만으로 볼 거리가 풍성하다는 말 입니다. 처음 러시아에 내렸을 때는 뭔가 삭막하고 거친 느낌이 있었습니다. 인종차별, 공산주의처럼 뭔가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이 있었지요. 하지만, 반나절만 지나니 오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인상은 험상궂고 퉁명스럽지만, 내면이 따뜻한 민족이라는 걸요. 그러지 않고서야 미술관에 이토록 훌륭한 작품들로 채울 수 없었겠지요. (비록 전쟁중이지만 대다수 러시아 국민들은 분명히 따뜻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러시아 국립미술관은 러시아 화가를 중심으로 고딕시대부터 근대미술까지 한 자리에 모아놓은 곳입니다. 같은 도시에 있는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쥬가 워낙 컸으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겠다는 짐작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지요. 그런데, 왠걸? 이곳을 훍어보는 데만 꼬박 8시간이 걸리더군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러시아의 역사를 총망라 했으니 말 할 것도 없지요. 웬만한 궁전 하나를 채울 만큼 작품들이 가득하니 러시아인의 문화적 자부심을 알 만 합니다.


  우리나라의 백남준이 미술사에서 비디오아트의 한 획을 그었다면 초강대국이었던 러시아에도 불세출의 화가가 있었겠지요? 비록 현대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쇠퇴하긴 했으나 50년 전 만해도 러시아는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은 강대국일수록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만약, 러시아가 지금까지 미국과 견줄 만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앤디워홀이나 잭슨폴록 대신 러시아의 화가들이 미술사에 가득했을 겁니다.


  미술사에서 러시아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선언함으로써 순수 추상화가 발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추상화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이끌었지요. 진정한 모더니즘이 시작된 겁니다. 다만, 개념이 너무 어려워져 보통 사람들은 미술에서 멀어지긴 했지만요.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러시아에서 개념미술이 탄생하긴 했지만, 가장 반대되는 사실주의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국립미술관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작품들도 사실주의 작품들이지요. 가로 10m, 세로 5m의 초대형 작품들이 벽면에 가득합니다. 제가 이곳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이겁니다. 누가 봐도 잘 그렸거든요. 사진 같은 그림에 감탄하게 됩니다. 또 사실주의의 특성상, 역사적 사건과 신화를 그려냈기에 배경 지식만 있다면 쉽게 감상할 수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동안 스쳐간 수 많은 미술관과 작품들 중에 예수 앞의 막달라 마리아를 마주하는 순간, 가장 특별하게 기억될 것 이란 걸 알았습니다. 마리아의 표정과 몸짓을 보는 순간 뭉클하게 다가오는 게 있었습니다. 눈물을 살짝 머금은 눈빛과 발갛게 달아오른 코 끝... 금방이라도 터질 듯 마리아의 표정이 심금을 울리더군요. 아련하고 애잔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님”이지만 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이 무척 공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간절한 저 손길이 보이시나요? 사랑했고 그리워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거절하는 “님”의 손길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새하얗고 길게 뻗은... 그래서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설렜던 지난 날의 기억. 하지만, 이제는 여기까지 인 것 같다고 매몰차게 뿌리치던 차가웠던 그 손길. 그럼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고 아련하게 남아 있는 바로 그 손...


  잊고 싶은데 잊을 수 없고, 버리고 싶은데 버릴 수 없다면 대체 어찌할까요? 안간힘을 쓰는데, 사랑은 진척되지 않고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면 그땐 어떻게 할까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은 결국 그리움으로 환생합니다. 생명이 스스로 끈을 놓는 법이 없듯 사랑은 스스로 체념하는 법을 모릅니다. 살아간다는 건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의 반복이라지만 사랑하는 날은 너무나 짧고, 이별의 고통은 너무 큽니다.


  “님”의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짙고 어두운 바다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짙은 바다 위에 애처롭게 떠 있는 조그만 멍텅구리 배지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애만 태우던 파도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당신의 마음이더군요. 찬란한 햇살이 비추는가 싶으면 깜깜한 밤으로 금새 바뀌는 깊고도 어두운 바다... 영문도 모르고 파도 따라 덩달아 흔들리던 마음은 당신이라는 거친 바다 위에 처연하게 떠 있습니다.



  마리아의 눈에 비친 예수는 분명 태양과 같았을 겁니다. 무작정 “님”이 좋았겠지요. 처음 해를 바라보는 어린 해바라기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해바라기와 태양 사이는 견우와 직녀처럼 은하수가 놓여져 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욕망이 보고 싶은 욕망보다 강할까요? 예수께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했다며 잡지 말라고 하시지만, 마리아에게는 그깟 게 중요할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그리움이 쌓이면 별이 된다고. 그래서 그리운 마음은 은하수가 된 모양입니다.



  불과 한 뼘이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진심이 닿지 않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움켜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립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그게 우리 사이에 놓여진 아득한 거리 때문인 것을. 애써 전해보려 하지만 억지 노력은 늘 허탈함으로 남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원하는 그녀의 간절함이 애처롭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님”을 그리워만 하는 여인의 모습만 있는 건 아닙니다. 서양 미술에서 그녀를 나타내는 도상이 무엇 인줄 아십니까? 바로 성배와 해골입니다. 성배는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해골은 ‘바니타스’라고 불리우는... 언젠가 우리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무상을 상징하지요. 그래서 그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은 참회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조르주 드 라투르 <촛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그녀는 조용히 방에서 기도했을 겁니다. 지난 시절,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 사랑의 열정이 빗나가기만 했던 시간들을 참회했겠지요. 그리고 깨달았을 겁니다. 모든 것이 떠나버린 허망함 속에 남는 것은 그 무상함 조차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을.


  그녀의 사랑은 하릴없이 짧았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어디에도 없으니 무상한 사랑이지요. 무상함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고통이 생기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다릅니다. 그 짧은 순간에 평생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한 마리아는 무상을 받아들이고 있어 무상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다. 놓아야 할 때 놓을 줄 알았던 거지요. 그리고, 밑바닥에 주저 앉아버린 약한 사람을 향합니다. 깨어지고 헐벗고 버려진 자들에게 손을 내밀지요.



  마리아는 참회를 통해서 “님”의 손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모두에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허무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낮아지는 일이었습니다. 약함을 안다는 것은 주님의 손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역설적으로 주님의 손을 놓아야만 그토록 소망하던 “님”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서야 저도 밑바닥에서 솔직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할 때 “님”을 향한 거리도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닫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그게 은하수를 건너는 일이고, "님"의 손을 마주하는 하는 일 임을 말 입니다.



[참고]

이주향_그림으로 읽는 철학

매거진의 이전글 [19C, 러시아 사실주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