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브리옹 Apr 20. 2022

[19C, 러시아 사실주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일리야 에피모비치 레핀 <볼가 강의 뱃사람들>

레핀 <볼가 강의 뱃사람들>


  최근 뉴스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요. 역사적 이유나 지정학적 배경을 차치하고서도 21세기에 이러한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습니다. 과거에 상트 페테스부르크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러시아 침공은 그 자체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적 상황을 떠나서 그 나라의 예술 자체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그 시대의 세태를 반영하는 거울이기에 러시아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요. 비록, 시간이 흘러 미술사적 의의는 따로 이뤄지겠지만요.



  통상 그 나라의 경제력과 예술 수준은 어느 정도 비례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풍족한 생활을 하다 보면 철학적 사유를 할 시간이 많아져서 수준 높은 예술 작품으로 치환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금 예외입니다. 현재 러시아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선진국까지는 아니더라도 발레와 음악 등 순수예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이러한 민족적 밑바탕을 가졌기에 19세기에 경제력 또한 최강이던 시기에 탄생한 작품은 그야말로 미술사적으로 대단했었지요. 특히,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작품들을 가까이서 보고 나면 만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볼가강의 뱃사람>은 일리야 레핀의 대표작으로 러시아 사실주의를 널리 알린 유명한 작품입니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지요. 수년 전 업무로 한창 바쁠 때 이 작품을 보고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점점 더 바빠지는 최근에 다시금 마음에 닿더군요. 위대한 작품은 시대를 가로질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영감을 주는 가 봅니다.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있습니다. 잠을 자도 늘 졸리고, 씩씩했던 걸음걸이도 터벅터벅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뒷굽도 어느덧 다 닳아버려 누렇게 헤져있습니다. 한참을 고개 숙여 풍파를 모질게 겪은 구두를 바라보다, 문뜩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랑 나랑은 참 닮았구나…


고흐 <한 켤레의 구두>


  너덜 해진 구두를 보자니 마치 고달픈 우리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예전에 날렵하고 맵시 나던 그 예쁜 모습은 간데없고, 여기저기 긁히고 무뎌진 구두창에는 세상의 아픔이 묻어있지요. 그래서 그런지, 닳아버린 뒷굽만큼이나 세상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볼가 강의 뱃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의 탄생은 레핀이 젊은 시절 강가로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다가 우연히 몸에 줄을 매고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머리는 헤쳐진 체로 사력을 다하는 것이 깊게 각인된 거지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노인의 표정… 무거운 노동에 심신이 피폐해진 얼굴… 남은 힘을 쥐어짜서 남은 거라곤 악 밖에 남지 않은 눈동자를 보자니, 죽을힘을 다해 살아야 하는 그들과 도태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현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건 과한 비유일까요?



  공부에 미쳐라, 열정에 미쳐라, 꿈에 미쳐라, 온 천지에는 미치지 않고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열정을 다해 몰두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지만 미치지 않고 제정신으로 살면 안 되는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치열해진 세상 속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어도 세상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있고 헉헉대며 쫓아가기엔 몸이 무겁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우리가 지친 몸을 힘겹게 이끌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내 마음에 자리한 인정 욕구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귀를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그 마음을 정작 가벼이 여기지 못하고, 명예와 의로움을 중요시해도, 정작 그 마음까지 중요하게 여기진 못한다’



  사람은 돈보다 의로움을 추구한다고 말은 할지언정, 정작 사람 속 안에 있는 욕망까지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는 채근담의 격언입니다. 이처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주류사회의 지위를 버릴 수 있는 건 성인(聖人) 정도나 가능할 거예요. 세상 흐름에 맞춰 사는 범인(凡人)은 세상의 기대에 맞게 스스로를 불살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지쳐갑니다. 아니, 그건 불가항력과 같아서 거스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득불 피할 수 없는 이 길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잘 생각해보면, 몸이 바쁘다고 마음까지 피로한 건 아닙니다. 근심이 너무 많거나 불필요한 생각들이 ‘나’를 지배할 때 피곤한 법이지요. 걱정거리들을 떨쳐내야 하는데, 세속적인 욕망에 싸여있으니 그게 잘될 턱이 없습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억지로 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은 ‘다스림이 필요하지요.



  그 다스림의 시작은 이 삶의 궤적을 인정하는 게 첫걸음이라 생각해요. 내가 겪고 있는 이 삶의 길 역시 내가 걸어온 길입니다. 몇몇 길은 걷지 말았어야 했었고, 어떤 길은 가기 싫었지만 가야만 했었지요. 어찌됐던 그 모든 길들을 지나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 길.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을 다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당장은 힘이 들더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훨씬 수월합니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식하다고 욕을 먹고, 실수로 인해 질타를 받아도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것 역시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되니까요. 다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고, 깨달은 것들을 발판 삼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렇게 진심을 다해 걷다 보면 운명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에 이유가 없듯 운명에도 이유는 없습니다. 운명은 그저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내가 만들어 낸 모든 선택의 결과입니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 운명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 이지요.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게 아닙니다. 주어진 운명 속에서 긍정을 찾는 게 필요하다는 뜻 입니다.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인과율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이후의 삶은 전과 다르게 됩니다. 후회되고 쓰라린 선택의 결과가 <볼가 강의 뱃사람> 일지라도 과거로 부터 이어져 온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때는 일이 나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지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가 가진 역량을 체험할 때, 하늘의 이치도 깨닫게 됩니다. 그게 지금 걷고 있는 돌길이 꽃길이 되는 일이겠지요.



  내가 당장 무거운 배를 이끌지라도, 그 안에 가치를 찾는 것.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 하늘의 기운을 얻는 힘. 그게 바로 수양의 길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C, 프랑스 사실주의] 변화의 시작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