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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Jul 30. 2020

[17C, 로코코]  사람의 인연, 시절의 인연

샤를조제프 나투아르<바쿠스와 아리아드네>


샤를조제프 나투아르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국립박물관 예르미타시 전]
 
  국립박물관에서 진행했던 예르미타시 박물관전에 다녀왔습니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작품은 없었지만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 미술사의 흐름대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유익했지요. 생각해보면 특정한 1인의 전시회보다 시대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들이 한국에서 호응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 역시도 제대로 된 미술감상을 위해 미술사를 공부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미술사를 더 알고 싶어 하는 니즈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미술은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만,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화가가 존재해도 화풍(그림 스타일)은 비교적 몇 개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고딕-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아카데미즘-라파엘전파-인상주의까지가 약 400년간 이어온 미술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조금만 관심을 갖고 공부하면 굳이 수많은 화가들을 외우지 않아도  시대의 화풍을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지요. 



  이번 미술전도 마찬가지였지요.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탄생 자체가 러시아 왕가의 컬렉션에 기반하기에 러시아 화가 작품보다는 프랑스/영국/스페인 화가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여느 전시회와 비슷했고 그 덕분에 당시 러시아 왕족이 선호했던 프랑스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새로웠습니다. 특히 로코코 양식의 작품들이 많았던 게 기억에 남네요. 아무래도 향락적이고 고급스러운 느낌 탓에 많이 찾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프라고나르 <그네>


  로코코 양식의 첫 느낌은 화려하고 예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로코코의 탄생 배경이 절대왕정 시대에 귀족들이 집안을 꾸밀 요량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럴 법도 하지요. 그러나, 특별한 철학이 없고 향락적이라는 이유로 미술사에서는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적 사치는 죄악시되었기에 약 60여 년(루이 15세~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짧은 기간 동안 작품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금번처럼 연대기를 다루는 전시회에서는 고작 2~3 작품 정도만 전시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강력한 왕정체제를 유지하는 러시아에서는 로코코 양식이 죄악시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특유의 향락적이고 유희적인 느낌이 당시 러시아 왕족의 부유함과 코드가 맞았는지 모르지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는 미술사에서 꽤 유명한 주제입니다만, 기본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마냥 아름다운 풍경화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림의 주인공이 겪어온 시간을 알면 마냥 예쁘다고 할 순 없지요.

 

카라바죠 <병든바쿠스> / 워터하우스 <아리아드네>


 데미갓이 그러하듯 바쿠스도 제우스의 외도로 탄생했기에 헤라 여신의 괴롭힘을 당합니다. 태어날 적부터 헤라의 계략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올림포스의 신으로서 유일하게 인간의 피가 섞여있다는 점에서 자격지심 또한 있지요. 심지어 그는 처음부터 올림포스의 12 신도 아니었는데, 헤스티아가 물러나면서 올림포스를 구성하는 12명의 신 중에 마지막으로 결정됩니다. 조용하고 따뜻한 헤스티아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바쿠스는 여전히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었겠지요. 그 긴 세월 동안 겪었을 방황의 시간을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포도주의 신이었기에 늘 취해 있었겠지요. 그가 축제와 기쁨의 신이면서 광기의 신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또 어떠한가요? 아버지를 배반하여 사랑하는 테세우스를 위해 미궁에서 나올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줬지만 크레타 섬에서 버림받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리아드네를 표현했던 작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라파엘전파의 거장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그녀 뒤로 배 한 척이 떠나갑니다. 그 배 안에는 그녀가 사랑한 영웅 테세우스가 있지요.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에게 버림받는 그녀... 그렇게 섬에 홀로 남은 아리아드네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지만 그만큼의 이별도 존재합니다. 때로는 이별을 당하고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쏟아내기도 하지요. 처음 설레던 마음에서 좌절이 되어버린 상처 때문일까요? 타오르던 분노는 상대방에 대한 험담이 될 수도, 잘못된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노는 점차 눈물이 되고 마음 한 켠에는 무거운 슬픔으로 자리 잡게 되지요. 하지만, 떠나버린 그 사람을 미워하는 삶은 아직도 내 인생의 주인이 그 사람인 겁니다.  탓하면 문제의 해결은 남에게 달려있습니다.  탓만 하는데 문제가 해결될 턱이 있나요. 문제의 원인을 나로부터 찾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법입니다. 내 탓을 인정해야만 인연의 매듭이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결국 누가 뭐라 해도  인 겁니다.


  신화 속 그녀도 홀로 남겨진 섬에서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테세우스를 저주하지도 않았지요. 비련의 여주인공임에도 워터하우스가 그린 그녀의 모습이 불쌍해 보이기는커녕 소중해 보입니다. 붉은색의 실크 드레스와 발갛게 달아오른 홍조가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요. 그녀는 인연의 허망함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그녀의 위대함은 미궁 입구에 실을 연결하여 길을 찾아오도록  지혜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린  있다는 것을 .


 사람의 인연은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유지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심지어 최선을 다했더라도 꼭 이뤄지는 법도 없습니다.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가 서로 얼마나 사랑했겠나요? 그럼에도 이루지 못함은 서로의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왕자였고 아리아드네는 적국의 공주였습니다. 시간이 흘렀다면 모를까 당장은 이뤄질 수 없는 인연이었겠지요. 시절인연이 맞지 않았던 겁니다.


  시절인연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상황과 시대에 흐름에 맞춰 자연스레 내 운명도 흘러가는 인연 아닌가요? 슬프게도 개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천시(天時)가 맞지 않는다면 일이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데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스르면 끝이 좋을 수 없지요.  


  시대를 잘못 태어나 불행했던 인물이 얼마나 많던가요? 불행의 시대가 수년이 될 수도... 수십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절인연이 맞지 않아 기약 없고 희망 없는 시대에 좌절하여 속세를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의 인연은 노력으로 된다지만 시절인연은 대체 어떡해야 하나요? 모함으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용 선생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폐족이다. 하지만, 독서하기 좋은 때를 만났다. 집안이 망했기 때문에 오히려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잘 처신해야 한다. 너희가 슬기롭고 굳건하게 극복하여 본래의 가문보다 더 훌륭하게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장한 일 아니겠느냐?"



  무려 18년의 시간 동안 본분을 잊지 않으며 인시(人時)와 천시(天時)가 조화를 이룰 때까지 근면했던 겁니다. 거스를 수 없는 시절인연이라 해도 인내가 함께하면 결실을 이룹니다. 그게 바로 인연과(因緣果)지요. 인연의 뜻 자체가 원인과 결과라는 점에서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스스로 돌이켜보고 나를 지켜내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티치아노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워터하우스의 <아리아드네>의 그녀 발 밑에 지켜주는 듯 서성이는 표범 한 마리 보이시나요? 바로 바쿠스의 표상입니다. 비록 테세우스는 떠나갔지만 인내와 온유함으로 내면에 집중하던 그녀는 또 다른 운명인 바쿠스를 만나 아내가 되고 하늘의 별자리가 됩니다.



 “운명을 아는 자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하며,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을 원망치 아니한다”
 


 우리 삶 속에는 수많은 인연이 있습니다. 남녀를 떠나서 누구나 테세우스가 될 수 있고 아리아드네가 될 수 있겠지만 어떠한 인연이든 간에 정성을 다해야 후회가 없을 거예요. 시절인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때에 이르지 못했어도 스스로를 지켜내며 인내한다면 언젠가 때에 이르러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겁니다. 저도 그런 인연이고 싶어요. 따뜻한 인연.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인연. 어려운 시절 조차 인내하여 결실로 남을 수 있는 인연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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