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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브리옹 Sep 20. 2020

[18C, 그랜드 투어]  머무름의 시대에서

지오반니 안토니오 카날레토 <베네치아 풍경>


카날레토 <The Bucintoro>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항간에는 백신이 개발되기 위해서는 약 1-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말하는데, 그동안 해외여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나라를 여행했기에 특별히 가고 싶은 나라는 별로 없었지만, 갈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지금이 아쉽습니다. 가지 않는 것과 갈 수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니까요. 요즘 즐겨 듣는 이적의 노래처럼 <당연한 것들>이 참 요원하게 느껴지네요.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처음엔 쉽게 여겼죠,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삶에서 여행은 참 중요합니다. 용혜원 시인께서 말하길, 여행은 어느 곳이든 설렘과 기대감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즐거움이라 했지요. 참 맞는 말입니다. 낯선 사람들과 나누는 정감. 새로운 장소, 신기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그리고 약간의 고난과 우연한 행운 통해 느껴보는 소소한 감사... 영국의 철학자 브하그완은 말했습니다.


"여행은 그대에게 세 가지 유익함을 줄 것이다. 첫째는 타향에 대한 지식이고, 둘째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며, 셋째는 그대 자신에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먼 곳으로의 여행이 어려워진 지금, 역설적으로 미술사에서 "여행"이라는 단어가 중요 키워드였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 시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랜드 투어는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이 녹아있다기보다, 당시의 생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로코코 시대의 향락적 부유함은 귀족들의 사교육으로 이어져, 부유한 자제들이 수년 동안 지도교사와 함께 서양문명의 시초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유학이었던 셈이지요.


카날레토 그림과 현대의 사진 <Ritalto bridge>


  우리도 여행을 떠나면 기념사진을 남기지요? 사진이 존재하지 않던 18세기에는 그림이 장소를 추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랜드 투어 시대에는 그리스 신화 또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 주제보다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풍경을 정밀하게 그려내는 것에 집중합니다. 작품을 보면 어떤가요?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 덕분에 18세기의 베네치아를 기억할 수 있지 않나요? 사진으로 당시를 추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카날레토의 그림을 보니, 베네치아로 여행했던 당시가 생각납니다. 리알토 다리와 곤돌라, 산마르코 광장의 야경, 두칼리 궁전에 가득했던 틴토레토의 작품들, 엽서 같던 부라노섬의 풍경... 제게 첫 유럽여행의 첫 번째 도시라서 더더욱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요.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다시 가고 싶은 도시 입니다.

 


  모든 미술의 역사가 그러하지만, 풍경을 주된 주제로 담은 그림이 그랜드 투어 시대에 갑자기 탄생한 건 아닙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가 인물 중심의 강렬한 바로크가 유행할 때, 일부 화가들은 목가적인 자연풍경을 그려냈지요. 그중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과 반 로이스달을 가장 중요한 풍경화가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신화나 성경이 주제가 아닌, 자연을 주인공 삼아 그렸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더 나아가 하이퍼 리얼리즘의 시초로 볼 수도 있겠네요.

클로드 로랭<파리의 심판> / 반 로이스달 <하를렘의 풍경>


  사람마다 감상의 차이법이 있겠지만, 저는 풍경화를 감상할 때, 그 장소에 진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가가 힘주어 표현한 부분에 집중하고 거기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화가가 바라보는 풍경과 동화된 듯한 환상을 일으키지요. 2차원의 그림이 영상처럼 보여지고 화가가 눈에 담은 풍경이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그 느낌이 참 좋아요.



  하지만, 이제는 저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어도 당장은 어렵습니다. 여행이 힘들어진 오늘날, 풍경화만이 우리에게 여행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이네요. 그랜드 투어는 꿈처럼 여겨지는 지금... 머무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정말 배우고 느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여행을 꿈만 꾸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이해하고 싶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읽어봤습니다. 예전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은 작품인데, 다시금 읽어보면서 질병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더군요.


  페스트의 배경은 알제리에 위치한 오랑시입니다. 여느 도시들처럼 평범했지요. 하지만, 4월의 어느 날부터 갑자기 쥐들이 죽어나갑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몇 마리였지만 시간이 지나 하루에 8,000여 마리가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자. 사람들이 불안해하지요.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쥐들의 죽음이 잦아들지만, 이제부터 사람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갑니다. 여기서부터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무능함과 페스트의 잔인함을 표현합니다.


"재앙은 언제든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앙이 발등에 떨어졌을 때에도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페스트에 짓밟혀 새 한 마리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아테네, 소리 없이 최후의 발작을 일으키며 죽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중국의 도시들...(중략) 페스트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가게 되었을 때 갈고리에 끌려 나오던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대혼란, 공포에 휩싸인 런던 거리의 구급차들과 환자들의 신음소리..."


미첼 스위츠 <아테네의 역병>


  소설 속 오랑시는 결국 폐쇄됩니다. 참 신기한 것이 50여 년 전에 쓴 소설 속 오랑시 모습과 코로나로 혼란스러운 현시대가 참 비슷하더군요. 21세기의 오늘날 국경이 닫힌 것처럼, 오랑시의 왕래는 끊어지자, 혼란 속에서 위안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미신을 쫒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심리와 혼돈이 맞물려 시위와 약탈까지 발생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도 코로나로 인해 무질서가 판을 치지요. 이 상황에서 성당의 신부는 회개의 시간이 왔다고 외칩니다.



"이제 죄를 뉘우치고, 신의 참뜻을 깨닫고 참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이 재난이 오히려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신에게로 인도하여 이 고난을 벗어나도록 이끌겠습니다.”


  종교가 있는 저로서는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소설은 ‘신은 존재하는가?’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소설 전반에 그런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지요. 종교가 갖는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맹목적인 믿음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 또한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소수의 특정 교회를 중심으로 코로나가 재확산된 상황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이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페스트에 걸려 신음하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개발된 백신을 실험하기로 합니다. 아이만큼은 살아날 거라 굳은 믿음으로 아이는 백신을 맞혔지만, 경련에 뒤틀리고 엄청난 고통에 비명 지르며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게 되지요. 의사였던 리외는 파늘루 신부에게 외칩니다.


" 적어도 저 애만은 죄가 없어요. 신부님도 아시잖아요!"


"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땐 화가 날 만도 하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까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란 말입니까?!"  

피테르 브뤼겔 <죽음의 승리>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코로나도 신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 생긴 걸까요? 신은 진정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 깊은 뜻을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소설에서는 파늘루 신부는 무조건적인 복종이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라고 말하지만, 파늘루 신부조차 페스트와 유사한 병으로 죽고 맙니다.


  페스트가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자율 보건대를 조직해서 대처해 나갑니다.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해나갔던 것이지요. 저는 이점이 코로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깨달아아 할 점이라고 생각해요. 신앙에 의지하고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나약한 인간들이 협동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페스트>는 말합니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의사 리외, 이방인이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타루, 신을 믿는 사제 파늘루, 오랑시를 탈출하려던 기자 랑베르.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은 달랐지만  페스트를 극복하기 위해 연대하지요.


  그렇다면, 연대를 한 결과로 페스트를 물리쳤을까요? 아니요. 그런 해피엔딩으로 끝맺었다면 좋았겠지만, 소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연대했음에도 똑같이 좌절하고 힘겨워합니다. 겨울이 오면 나아질 거라 믿음도 무너지고 유언비어에 동요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어느덧 사라졌던 쥐들이 돌아오고 죽기 직전의 사람들도 기적적으로 회복합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시작한 거죠.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일 수도 있고 신이 노여움을 거두고 축복을 내려줬을 수도 있겠지요. 카뮈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에 따른 결과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설명을 합니다.


  사람들은 조심스레 상점을 다시 열었고,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도 다시 사람들을 받아들입니다. 모든 통계지표가 나아지자, 시 당국은 페스트가 물러가고 있음을 발표합니다. 무엇보다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페스트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희망이 용솟음치고 있었지요. 페스트가 퍼지면서 일련의 사건들... 가령, 공무원들의 무능함, 사람들의 무지함, 종교의 역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소설 <페스트>를 통해서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리외의 독백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우정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과 언젠가는 그것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이겠지"



  머무름의 시대에서... 고통의 시간에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연대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이 언제쯤 끝날 것이라 예상할 수 없습니다. 1~2년이 될 수도... 어쩌면 해마다 유행하는 독감처럼 평생을 갈 수도 있겠지요. 인류 역사에 재앙으로 기록될 겁니다.


  소설 맨 마지막 문단에서는 페스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집요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앞으로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동시에 일깨워 주기 위해서 평화로운 도시에 죽게 할 날이 올 것이라 하지요. 섬뜩하지만 참 맞는 말입니다.
 

안중근 열사 <위국헌신 군인본분>


  다만, 서로 연대한다는 게 거창한 무언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사람을 조직하거나 어떤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문제점에 대해 공유하되, 자기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서 자리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의사 리외는 사람을 살폈고, 파늘루 신부는 사람의 마음을 다독였고, 이방인 파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코로나 한가운데 있는 우리들이 곱씹어 생각해볼 일이지요.


“ 마스크를 쓰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이며, 손을 깨끗이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고, 사람과 거리를 두라는 것은 자연과 가까이하라는 것이다”


  부산의 안중덕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말씀의 일부입니다. 머무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은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스스로를 살피고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때가 아닌가 싶어요. 그것이 사회와 연대하여 코로나를 극복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될 테니까요.


* 참고

- 알베르 카뮈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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