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루브르 박물관 후기]
신고전주의의 탄생은 그동안 막연하게 존재하던 미술의 가치관... 즉, ‘이성이냐 감성이냐’라는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하는 계기가 됩니다. 신고전주의는 지성인으로서 당 시대를 역동적으로 비판하기도 하면서 안정적인 구도로 표현한 탓에 두 가지 철학이 혼재되었다면 그 후대의 제자들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미술사조를 형성합니다. 현재까지도 터질 것 같은 감성(액션페인팅)과 차분한 이성(미니멀리즘)이라는 두 가지 철학은 그 시대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지요.
처음 낭만주의(romanticsm)라는 단어만 보면 뭔가 남녀 간의 사랑과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 사랑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호소하는 성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분위기가 정치, 철학, 음악 등이 당시 사회문화와 결합하면서 개인의 창의력과 자유로움이 장려되었기 때문인데요, 이러한 낭만주의적 가치관은 18세기 계몽주의 특유의 합리적인 사고에 대한 반발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없는 듯이 말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아카데미즘이 전통적인 가치관을 바탕으로 궁극의 미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했다면, 시대의 부조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군중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화풍이 낭만주의로 발달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감정과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방식이 세상을 이끄는 또 다른 원동력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대담한 화풍으로 인간의 기본적 감성에 호소하는 성향이 강했지요.
물론, 각 나라마다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낭만주의 작품들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나타냅니다. 그중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혼란하던 시대상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지요. 그중 <메두사 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회화의 신호탄을 알린 작품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그림으로, 이 작품의 깊은 뜻을 알려면 그리게 된 계기를 알아야 합니다.
루이 18세는 세네갈을 식민화할 요량으로 400명가량의 메두사호를 보냈으나, 폭풍으로 배가 난파됩니다. 문제는 신분이나 계급이 높은 250명은 구명보트를 먼저 타고 도망갔지만 나머지는 배에 그대로 남아 죽을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남겨진 사람들은 뗏목을 급조해 구조대가 오기를 표류하며 기다리고, 13일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 뒤에 기적적으로 근처를 지나는 배를 만나 구조됩니다. 하지만 이때 생존자는 겨우 15명에 불과했고, 그중 5명은 구조되자마자 죽지요. 생각해 보세요. 약 150여 명의 사람들은 계급이 낮다는 이유로 죽음을 강요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찰 노릇입니까?
그렇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은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평민들의 요구가 들풀처럼 번지는 상황에서 150명이나 되는 인원을 버리고 도망간 이들의 행태와, 겨우 소수만 살아남은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프랑스 시민 사회는 들썩이게 됩니다. 결국 함장인 쇼마레 대령에게 그 책임을 물었는데, 겨우 직무 해제와 3년 금고형으로 판결됩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판결에 민중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결국 이 사건은 프랑스를 넘어 주변 국가까지 주목하는 대형사건으로 발전하지요. 당시 젊은 화가였던 제리코도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분노하며 당시의 생존자를 몸소 만나 이야기를 듣고 죽어가는 환자를 직접 관찰한 끝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메두사호의 뗏목>입니다.
처음에는 역동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절박한 상황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뗏목에 죽어가는 인물들과 저 멀리 지나가는 배… 그리고 붉은색 천을 필사적으로 흔들고 있는 생존자의 마지막 몸부림이 당시의 잔혹함과 처절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이점이 <메두사호의 뗏목>을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작품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실제로 봤을 때, 처음에는 잔인한 인간의 본성과 극단적인 상황에 다다른 이의 처절함이 먼저 다가왔지만 작품을 바라볼수록 테오도르 제리코가 사회에 던진 화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약 400여명의 승객 가운데, 귀족계급을 살리기 위해 희생당한 150여명의 사람들. 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에도 겨우 3여년의 금고형만 판결받은 사회를 도저히 정의롭다할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아마도 테오도르 제리코 역시 작품을 그리면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겠지요.
정의(justice)에 대해서 정의(define)하자면, 단순히 공평하고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이기는 합니다. 기억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던게 생각나네요. 저자였던 마이클 샌델은 책에서 정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칸트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생각하기에, 과거사 같은 부분은 조상들의 문제였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벤담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공동의 이익을 우선하기에 장애인과 같은 소수집단의 희생을 당연시 생각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사람들은 희생해도 된다는... 공리주의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250명을 살리기 위해 150명이 희생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을까요? 더 나아가 다수를 살리기 위해 선량한 소수를 죽인 살인자는 무죄로 판결할 수 있을까요? 즉, 다수를 위한 희생이 올바른 “정의”냐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책의 종반부에서 샌델은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한 환경을 봐야 하며, 인간은 공공의 목적을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기에, 인류의 정의를 민주적 방식에 의해 토론과 합의를 통해 찾아나가야 한다.’
정말 맞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토론과 합의를 통해 정의를 찾아간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현실 세계에서는 소수가 희생 당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진영논리가 당연시되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요?
정의와 법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공정한 집행으로서 정의사회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는 불의한 짓을 해도 처벌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이라 함은 법과 정의가 일치해야 하고 그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메두사호의 함장 쇼마레가 가벼운 금고형으로 처분된 것처럼, 2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은 무죄를 받거나 가벼운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도 합니다. 과연 지금의 사법기관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의는 그 자체로 옳은 것이며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 기준은 법으로 확립됩니다. 우리가 법을 따르고 지키게끔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입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합법성이 정당성보다 중요한데, 과연 합법적으로 주어진 권위가 정당하게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직 소크라테스 본인에 대한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악법이라는 것 자체가 차별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의 영웅적인 태도로 인해 다른 사람도 희생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거니까요. 온당치 못한 판결은 저항해야 하며 우리는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정의는 공정함이 전제되는 질서의 미덕이며 상호 간에 교환 이익이 보장될 때, 빛을 발할 수 있는 평등의 미덕입니다. 그렇기에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했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길이지요.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온당치 못한 판결에 저항하며 끝까지 싸워나갑니다.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는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사는기라고... 바위는 부서져가 모래가 되고 계란은 살아서 그 모래를 넘는다...그카는 얘기는 모릅니까?"
(중략)
"...다 끝났다카던데요. 계란으로 바위 치는 일이라고"
"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는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산기라고... 계란이 바위 넘는다고 니 안 그랬나? 니 말대로 그 바위 넘어 서야제, 여기서 깨지고 말끼가"
앞날이 항상 정의로울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불의와 불평등이 있어왔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외면하지 않는 한, 부당한 권력의 옳지 못한 일을 보고서 모른 채 하지 않는 한, 살아있는 달걀은 죽은 바위를 이길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이며 과거보다 조금은 더 평등해진... 인류가 만들어온 지금의 사회라고 생각해요.
18세기 낭만주의가 뿌린 씨앗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투영할수록 사회는 점점 투명해질 것이라는 믿음... 그런 세상에서는 분명히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더 정의로울 것이라는 희망이 21세기의 오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의롭지만은 않은 세상에서 불의한 자가 응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바위 같은 달걀'이 되어야겠지요. 왜냐하면, 정의가 정의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를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참고]
- 미덕이란 무엇인가_앙드레 콩트-스퐁빌
- 세상을 비추는 거울, 미술_줄리언 벨
- 영화 변호인
- 정의란 무엇인가_마이클 샌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