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의 내 베프

by Paul park

어느 이른 새벽, 나는 의사 파업 문제와 각종 사회, 시사 문제점들이 들끓는 뉴스가 나오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어느샌가 뒤엉켜버린 우리 사회, 취업도 일자리도, 어느새 앞날이 불확실해져 버린 나, 정부가 조작해 버린 의료계의 타격, 그 여파로 나와 몸담고 있는 각종 의료인들과 더불어, 의료의 가치가 부자연스럽게 주저앉는 환영들


요즘은 그 불안감이 나의 일부같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는, 크게 불안에 떠는 법을 잊게 되는 것 같다. (이게 긍정적인 바람의 신호였으면 좋으련만)

겸허하게.. 우리가 우리 자신대로 살아가기가 앞으로 더 어려워지는 것만 같고. 힘이 든다고, 용기 없는 이름을 눈앞에 있는 대로 꺼내본다.



숙소도 없이 부산으로 무작정 떠났던 무더운 여느날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일천시간의 실습종료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종강을 마친 나는 머리가 꽁꽁 엉켜버린 털실처럼 복잡했던 탓에, 적당한 도피처를 찾았다. 스윔팬츠와 간단한 사진정도를 담을 수 있는 카메라를 케리어에 던져 넣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일여 년 만에, 찾은 부산은 내게 흐리멍덩한 하늘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었다. 아무런 갈 곳 없이 흐려져버린 나처럼, 몇 날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익숙한 몰골을 한 채 서둘러 전철에 올라탔다. 날씨는 더웠고, 태양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량같이 사흘간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겠어.'

와 같이 생각하며, 아직 세상 것들에 많이 열려있는 양,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그 기분들에 걸맞은 책들을 얻고자, 가장 먼저 알라딘 중고서점에 향했다.

그곳에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아니 에르노의 저서 '사진의 용도'(익산역사 근처 '르물랑'을 꾸려가고 계신 신유진 작가님 옮김)와 이반 투르게네프의 한 문고본을 택하고선 서둘러 숙소로 발을 옮겼다. 내가 묵던 값싼 도미토리는 운이 좋게도 해운대 앞바다를 등지고 있었다. 당연하다시피, 25도를 웃도는 간지러운 해풍에 발이 묶여버린 나는 끈적한 태닝 오일과 함께 두어 시간을 해운대 앞바다에서 뒹굴었다.



나는 언어에 묶인 여행들, '여행 중 접한 글들로 내 기분을 뒤흔드는 그 감각'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두 가지, 당시의 복잡 미묘한 심리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거나, 내가 시간을 들여 느끼고자 했던 기분과 여행의 산물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훼방'하는 기가 막히게 끔찍한 문장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그때마다, 삶이 진부하기 그지없는 글의 소재가 되어줄 것이란 착각을 하지 말길 바란다던, 어떠한 글 꼭지를 떠올려 생각해 본다.


서두르지 않는 뚜렷한 자의식, 아무런 목적 없는 발걸음, 타인을 밝혀주는 시선들. 이기적이지 않은, 자타의 적인 존중이 나타나는 여행의 태도는, 사소하지만 우리 모두를 여행자로 꿈꾸게 해 주었다.


평소에는 해보지 못했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패션이 용납되고, 시야차단용 선글라스 뒤로 은밀한 눈빛을 나 혼자 누려볼 수 있는 것도, 여행이기에 가능한 개인의 해방이었다.


잠시간 생각을 식힐거리들을 찾는다, 그 여백 속에 온갖 허례허식과 인정욕구를 가득 눌러 담는다. 나를 천당 구름 위로 올려주는 것도, 삼엄한 절벽에 몰아세우는 것도 전부 그뿐이었다.


건강한 이웃처럼, 늘 내 곁에 찾아오는 무색무취의 마음가짐은 내가 어떤 환경에 놓이건, 어떠한 생각들로 그날 하루가 어지럽혀지건, 늘 내 가슴 한 자리에 오롯한 '괄호'를 가져다준다.

요동치는 광선을 장시간 한 몸으로 내리받아 그을렸던 살갗처럼, 내가 어떤 결심을 품건, 삶을 한탄하건, 아픔을 삼켜내건. 그저 해프닝 정도라고 말해줄 테니. 우리는 이러한 무미건조한 마음가짐을, 나와 평생을 조우할 소중한 '베프' 정도로는 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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